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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과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는 사도바울
빌립보서 3:1~21
본문: 빌립보서 3:1~21
요절: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 가노라" (14절)

서론:

우리는 제2과를 통하여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를 약화 시키는 문제들이 무엇이며 그런 제반 문제들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 가를 배웠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함께 연구할 말씀은 외부적인 도전도 아니요 내부적인 갈등도 아닌 매우 해결하기 힘든 거짓 교사들에 대한 심각한 유혹을 극복해야 하는 문제에 대한 사도바울의 선생님의 권면입니다. 복음의 진수가 없는 인위적이고 형식적인 거짓 스승들의 가르침은 사도 바울 시대나 오늘에나 매우 심각한 복음의 암적 존재들임에 틀립없는 것입니다. 또한 오늘 말씀은 세상과 그리스도를 동시에 얻고자 하는 양다리 걸치기 그리스도인들에게 경종을 울려줍니다. 1절부터 11절까지는 종교인인체만 하는 형식주의자들에 대해 언급했고 18절부터 19절까지는 유물론자들에 대해서 경계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들을 볼 때 눈물이 났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영향력이 너무나 비 복음적인 것이기에 조심할 것은 누차 되풀이 하고 있습니다.

좀더 성숙한 신앙인으로 발돋음하기 위하여 본문 말씀연구는 매우 유익하리라고 믿습니다. 오늘 말씀은
I. 형식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자들인가?
II. 참된 그리스도인은 어떤 자들인가?
III. 오늘과 내일은 사는 참 그리스도인의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가?
라는 제목을 가지고 말씀을 연구하고자 합니다.

본론:

I. 형식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자들인가(1~3)?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은혜와 사람의 행위를 혼합시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본문은 빌립보 교회를 침범했던 그러한 집단에 대한 사도 바울의 권고와 간곡한 요청이 기록되어있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핍박중에 있었습니다.(1:28~30) 그들에게는 내적 갈등도 없지 않았습니다.(2:2) 그러나 이런 시련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고(2:1~11) 하나님의 능력을 덧 입을때(2:12~18) 이런것들은 해결되며 오히려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역경을 돌파하는 감격을 빌립보 교인들이 체험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3장 초반에 언급된 이 문제는 사도바울과 빌립보 교인들이 결코 낙관적으로 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바로 율법주의적 기독교인들의 교묘한 도전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선교 초기부터 큰 문제였고 그가 감옥에 갇혀 있는 당시에도 독버섯처럼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이들중 대부분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방인들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회의는 율법보다 은혜의 입장을 택했습니다.(행15:22!35) 그러나 이들은 이 사실을 받아 들이지 않고 자기들의 고집을 계속 주장할 뿐더러 고린도 교회(고후11:13),로마 교회
(롬2;25~3:2,15:8), 갈라디아 교회(갈5:2), 골로새 교회(골4:11)등 수 많은 교회를 미혹하고 있었습니다.

복음에 대한 분별력이 약한 초대 교회에 들어온 이 위험은 성도들이 감당하기 힘든 기독교의 복음의 본질을 위협하는 것이었습니다. 2절을 보면 사도 바울 선생은 아주 강력한 말로 저들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삼가고...삼가고...삼가라"고 3번이나 거듭해서 말했습니다. 저들에 대한 사도 바울의 표현은 개들, 행악하는 자들, 손 할례당, 즉 병신의 무리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모욕적인 언사입니다. 개들이란 사람들이 보통 사랑할 수 있는 개들로 지칭한 것이 아닙니다. 이 개들은 팔레스틴 거리를 돌아 다니던 사나운 개들이었습니다. 저들은 집도 없고 주인도 없이 길거리를 배회하며 쓰레기통을 뒤지고 자기들끼리 물고 찢는 것입니다. 저들은 가끔 지나가는 행인을 물기도 한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개"라고 표현했습니다.

저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악한 일꾼들입니다. 돕는 일꾼이 아니라 해하는 일군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를 파괴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저들을 손 할례당이라고 했습니다. 율법주의 종교는 할례를 강조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할례를 자랑했습니다. 저들은 사람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두가지 사실 곧 할례와 믿음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3절에서 사도 바울은 참된 그리스도인은 참된 유대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할례는 어떤 의식적인것 보다 마음이 죄로부터 깨끗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죄로부터의 단절없는 육신적인 할례란 별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2장28,29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찌니 심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니라" 율법주의자들은 복음의 핵심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에베소서2:8,9절에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다시 말하지만 할례란 불순한 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은 참된 할례를 행한 것입니다. 3절 말씀은 참되게 할례를 받은 참된 그리스도인에 관하여 말씀하는 것입니다.

II. 참된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인가(4~10)?

참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예배하는 사람입니다.
즉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로와진 심령에서 울려나와 예배를 드립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3장5절에서 니고데모에게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참된 자세로 예배하는 자가 바로 참 하례를 받은 표지입니다.(요4:24) 그러므로 참된 예배는 생활의 내면적인 변화가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랑" 합니다.

참 그리스도인은 약한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말하지 아니합니다. 우리의 구주요, 친구요, 주님을 부끄러워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사도바울은 "자랑"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했습니다. 그는 그의 서간문중에 35회나 사용했습니다. 빌립보교회에 있던 거짓 교사들은 할례를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그리스도를 자랑하자"고 외칩니다. 우리의 구원의 기초는 할례가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사역만이 구원의 기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행위나 의를 자랑하기 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그의 십자가를 자랑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6장14절을 보면 "그러나 내게는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자랑"합시다. 오늘날 적지않은 그리스도인들이 저들의 신앙을 말하기를 주저하고 있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육체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이 여기에서 "육체"를 말할때 그것은 육체적인 실제의 몸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육체란 구원의 기초가 되는 그리스도로부터 떠나는 것을 말합니다. 유대주의자들은 할례를 자랑하고 유대의식의 율법을 성실하게 지키는 것을 자랑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할례를 행하는 율법을 신뢰하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밖에 어떤 것을 신뢰할 때 우리는 육체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육체를 신뢰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이것이 바로 구원을 받기 위해서 우리 자신들의 선행에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십일조를 내고 구제금을 내었으므로 하늘 나라에 갈것이라고 믿는 사람과 같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모든 인간적인 조건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과 무할례와 그리스도만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주의자들은 행위와 할례와 율법의 준수를 덧붙였습니다. 사실 사도 바울은 전에는 후자의 입장을 준수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이후로 행위와 율법으로 구원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사실을 빌립보 교회에 상기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3장 4~7절은 사도 바울이 유대인으로서 이뤄놓은 모든 공적인 명세서입니다. 이 모든 말 끝에서 그는 "이것들이 다 가치가 없음으로 버렸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이러한 조건들은 구원을 얻는데 장애물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이 왜 장애물이 되는가하는 그 이유까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본문 가운데서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을 빌립보교회 거짓 스승들과 비교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구원을 위해서 자기 자신들을 믿고 있었습니다. 3절에서 그들은 "육체를 신뢰한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육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 받을 수 있다면, 나 자신도 신뢰할만한 것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거짓스승들이 유리한 입장을 들때마다 그는 대답하기를 "나는 더 유리하다"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인이 되기 이전의 자신의 삶의 한 단면을 회고해 보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는 많은 특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혀 자신을 구원하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할례라는 것으로 교만해져 있었습니다. 그러면 왜 이런 좋은 인간 조건이 구원과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까?

◈이 특권중의 하나는 날때부터 그 부모로부터 받은 것들 입니다. 그는 8일만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는 뒤늦게 유대 신앙으로 개종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의 자랑스런 자격은 유대인의 핏줄을 타고 났습니다.

◈그중 또 하나는 "이스라엘 족속"이란 점을 들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조상의 직계후손 이었습니다. 그는 베냐민 지파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베냐민지파의 분깃의 한부분이었습니다. 솔로몬 이후 남북왕국으로 갈라질 때 베냐민 지파는 유다 지파와 함께 남 왕국을 지켰습니다. 이스라엘의 첫 왕 사울도 베냐민 지파였으며 이국 땅에서 유대 백성을 구한 모르드개와 에스더도 베냐민지파였습니다. 베냐민지파는 이스라엘 민족중에서 명성이 있는 지파였고 그는 그 지파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또 자신을 "히브리인중의 히브리인"이라고 했습니다. 그의 부모가 모두 히브리인 이었습니다. 이상의 것들은 그가 날때부터 타고난 것이었습니다.

◈그외에 그는 자기 자신의 노력으로 얻은 장점이 있었습니다. 예를 든다면 그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엄격하고 율법적인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율법을 위하여 최선의 삶을 살고자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교회를 핍박했습니다. 교회에 대한 그의 극렬한 반대를 보면 유대교에 대한 열심이 그를 얼마나 완전히 사로잡았던가를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또 "의로는 흠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의 생활은 도덕적이고 순결했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삽니다.(7절)
그런데 7절을 보십시오. 그는 이 모든 것을 "가치 없는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왜 이상의 좋은 인간 조건들을 거부할까요? "그리스도를 위해서" 였습니다. 자신의 특권과 선행과 자랑이 자신이나 이웃을 구원하지 못함을 그는 알았습니다. 그가 일생을 추구하던 구원을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했습니다. 우리들은 신앙생활 중 자신의 장점들을 무척 자랑하는 사람들을 간혹 만납니다. 학벌, 가문, 어떤교회, 특정한 달란트 등을 극대화 합니다. 사도바울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것들은 이웃을 잘 섬기는 도구는 될 수 있으나 구원의 길이 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그리스도를 자랑해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얻는 것을 기뻐합니다.(8~9절)
세상 사람들 중에는 삶의 목적을 갖지 못한채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혹있다고 하더라도 대개는 일시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너무나 많은 종류의 삶의 목적을 가지고 이리저리 끌려 다니다가 마침내는 그 어느 것 하나도 마음깊이 간직하지 못하게 되곤 합니다.
남이 꽃꽃이를 하면 그것이하고 싶고 피아노를 치면 피아노를, 그림을 그리면 또 그것을,...그러나 동시에 효도도하고 싶고, 수석의 영광도 누려보고 싶고 이름난 곳으로 등산도 가고 싶어 합니다. 어느것 하나 꼭 집어서 나쁘다고 할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목적이 하도 많으면 그 목적에 파묻혀서 참된 목적을 찾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생의 목적을 확실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말하기를 기뻐했습니다. 8,9절의 말씀을 보면 그의 삶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제시해 줍니다. 요약하면 첫째는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서 모든것을 포기하는 것이요, 둘째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전한 의를 얻고자 함이었습니다. 사실 사도바울이 주님께 헌신한 후 잃은 것이 많습니다. 그는 권력, 명예, 학문적연구, 기회, 안정된 생활, 건강, 시간 등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가장 귀한 것을 얻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와 그리스도를 아는 모든 것을 능가하는 뛰어난 지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축복에 비추어 볼 때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별 가치가 없었습니다. 바울은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리스도를 얻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9절에서 참된 의에 어떻게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가를 말씀해 주십니다. 참된 의는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된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선행, 자신의 의식에 매어달리는한 그는 유일하신 하나님과 화평을 가질 수 없습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우리의 의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와 관련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것이 아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의의 유일한 근원은 그리스도의 사역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부활의 능력과 고난에 참예함을 원합니다.(10~11절)
본문 중 "안다"는 말은 특별한 뜻이 있습니다. 이것은 책을 통해서 얻어지는 어떤 "지식"이 아닙니다. 외워서 얻은 지식이 아닙니다. 이것은 경험으로 얻어지는 지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함께 동거함으로 얻어지는 인격적인 지식을 말합니다. 다른 사람과의 연합에서 오는 지식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지식적으로 알고자 합니다. 성경을 상식적으로 판단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우리들에게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알게 되는 길이 무엇인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동거하면서 그리스도를 배워야 합니다. 날마다 주님과 이야기를 주고 받아야 합니다. 믿음을 통해서 연합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연구대상으로만 대할때 주님을 알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는 우리의 사랑의 대상이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삶의 중심에 그분이 계실 때라야 그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내포된 몇가지 사실을 살펴봅시다.

i) 그는 부활의 권능을 알려고 했습니다.
부활은 그리스도인에겐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들은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것처럼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부활의 능력이 모든 그리스도인 안에 거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능력을 점점 많이 받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왜 우리들은 죄와 사탄 앞에 참패하는 경험을 하는 것입니까?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것이 아닐까요?
우리들에게는 그리스도를 무덤에서 살려낸 그 권세가 있습니다. 문제는 이 능력을 매일 경험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생활에 이 능력이 적용되도록 기도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은 우리로 하여금 위의 것을 찾도록 명령하는것입니다.(골3:1)

ii) 고난에 참예하여 그리스도를 본 받고자 했습니다.
고난에 참예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할 수 있습니까?

사도 바울에 있어서 이 고난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매맞음과 돌로 밎음과 배고품과 목마름과 핍박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받는 고난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믿음 때문에 오는 고난을 각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을 위해서 그 고생을 견뎌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핍박을 받으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했기 때문에 우리도 핍박을 받을 것입니다.(갈2:20,롬6:6) 이런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아픈것입니다. 거룩함을 위한 열망과 노력은 아픈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경험을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 하는것"이라고 했습니다.

III. 오늘과 내일으 사는 참 그리스도인의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가?

1.경주자로서의 자세

12절로 14절을 보면 사도바울은 자신을 경주자처럼 비유하고 있습니다. 경주자는 목표 지점에 빨리 도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최선을 다해 뛰어야 합니다. 그래야 승리의 영예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경주자는 자신에 대하여 정확한 판단을 가져야 합니다.

◈부족함을 알고 있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 가노라"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완전 상태에 이르지 못한 자신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목표를 쟁취한 자가 아니라 그 지점을 향하여 달려가는 경주자 중의 하나라고 보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부족을 압니다. 그러나 그자리에 정지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에는 하나님이 주신 명령이 있습니다. 거룩한 삶, 온전한 삶, 그리스도께 잡힌바 된 삶입니다.

사실 이세상 생활 가운데서는 완전이란 결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정지하거나 포기할 것이 아니라 완전을 향하여 달려가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에게까지 자라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목표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뛰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의 목적은 승리였습니다.(14절)
일은 집중과 노력을 요구합니다. 오직 현재와 미래를 지향해야 할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거짓 스승들은 과거 지향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은 미래 지향적인 분이었습니다. (16절)

이 본문을 통해서 사도 바울은 자칭 완전론자들을 경고하시면서 우리들을 교훈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의 삶은 어떠합니까? 그리스도를 얻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의 고난과 부활에 참여합니까? 여러분의 삶의 목표가 그리스도요, 중심이 그리스도며 그에게 이르기 위하여 계속 성장하는 아픔과 감격을 경험합니까?(히12:1~2)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사람들입니까?(15,16)

2. 세상에 대한 자세

사도 바울은 여기서 자기 견해를 피력할 때 아주 놀라운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된 그리스도인들은 '형제"라고 부르면서 권면하고 있습니다. 증오와 공포의 세상에서 "형제"란 이 말은 아주 친밀한 것이며 사랑스러운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죽은 법전에 따라 살지 아니합니다. 산 표준을 따릅니다. 우리의 본은 살아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가장 완전한 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그 제자들의 본을 받아 주를 따르는 모범을 배울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나를 본받으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 말씀은 자기의 생활이 예수 그리스도와 같다는 교만한 것이 아닙니다. (고전11:1) 우리는 사도바 울이 그리스도를 본받았으므로 바울으 본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형식적인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이와같은 사람들에게는 적극적인 본이 필요합니다. 저들은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하나님과 동행하여야 할 것인가'에 대한 본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대부분 우리들은 행동으로 본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말로 본을 보입니다. 18절과 19절에서는 우리가 본받지 말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원수가 되어 사는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18절에서 멸망으로 인도하는 생활을 하는 사람이 많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생각할 때 그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저들의 마침은 멸망"이기 때문입니다. 영적 도덕적 파멸의 종착역은 멸망입니다. 멸망은 약한 생활의 열매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이 "배를 신으로 삼고"살기 때문에 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욕심과 음란에 빠져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들의 신은 하나님이 아니요 그들의 배였습니다. 즉 거짓 스승들의 자랑은 자기 자신들을 부끄럽게 하는데 있다고 바울은 보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부덕함을 자랑하기까지 한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도 실생활은 "땅의 일"만으로 좌우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육체의 일에만 정신을 팔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도외시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자들의 뒤를 따르지 맙시다. 그런데 그런자들은 자신이 그리스도인 임을 자처합니다. 경견한듯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통제보다 자신의 통제를 가진 자들을 따르면 안됩니다. 왜요? 그길이 멸망이기 때문입니다. 거짓 스승들은 경건한 말은 있을지 몰라도 경건함 섦은 없는자요 그 열매가 인간적인 자들입니다.(마7:21)

3. 미래에 대한 자세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의 복된 소망에 대하여 마지막 부분에서 우리에게 말합니다. 참 그리스도인의 하늘의 유업에 대하여 자세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이 강조하는 중심사상은 이러합니다. 첫째는 우리의 하늘에 있는 본향요, 둘째는 장차 오실 우리의 구주요, 셋째는 우리의 영광스러운 변화에 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2중 국적을 갖고 삽니다. 그 하나는 이땅이요 다른 하나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들의 새로운 출생지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요한복음3장에서 니고데모와 말씀하신 주님은 "위로부터 낳아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하늘의 표준에 따라 살고 평가 받습니다. 우리의 귀한 동역자들이 하늘에 있습니다. 거할 곳이 우리를 위해 준비되어 있습니다. (요14:3)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은 나그네요, 순례자요, 외국인입니다. 어느날엔가는 그곳에 가서 영원히 거할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이 말씀을 왜 썼을까요?
당시 빌립보교회에는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듯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그의 여원한 집이 지옥에 있는것 같이 사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다시 오시는 주님께 마음을 두지 않고 먹고 마시고 하는 일에만 관심을 두었습니다. 하늘의 시민이란 자각없이 세상시민 만으로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형태의 그리스도인을 오늘은 발견할 수 없을까요? 우리 자신은 어떻합니까?

성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느날엔가는 재림하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0절 말씀을 보면 재림을 준비할 그리스도인의 자세에 대하여 있습니다. 20절 말씀을 보면 재림을 준비할 그리스도인의 자세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공동 번역을 보면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대한다"고 기록했습니다. "기다린다","고대한다"는 말씀은 매우 강력한 표현입니다. 그것은 간절히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즉 하늘나라의 시민들은 모든 죄와 환락에서 돌이켜 주님의 재림을 환영할 기회를 간절히 열망하는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구세주이십니다.(20절) 만일 그분이 우리의 구주가 아니시라면 재림을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기쁨의 때가 아니요, 두려움과 심판의 때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주님을 영접하지 않은채 차일피일하여 형식적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면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겠습니까?

21절 말씀을 보면 그리스도인의 놀라운 유업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주님께서 주실 선물은 영광스러운 몸으로의 변화입니다. 주님께서 재람하실때 주님은 우리들의 몸까지도 하늘 나라에 알맞게 예비하실 것입니다. 죄로 상하고 연약하여 고난과 죽음에 썽을 몸이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처럼 만드실 것입니다(고전15:49). 우리들은 영혼과 육체를 갖고 삽니다. 주님께서 오실 때에 그가 우리의 영혼을 온전하게 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몸도 완전히 변화 시키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능력!
이것은 우리의 부활의 보증이 됩니다. 우리의 본향은 하늘나라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고대하며 완전히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할 것을 고대하는 믿음으로 성장해야 하겠습니다.

결론:

우리가 빌립보서 3장을 살펴볼 때 몇가지 도전에 직면하게 됩니다. 내가 주의 몸된 교회나 모임을 봉사 하지만 사도 바울 당시의 거짓 스승들처럼 오히려 주님의 공동체를 약화시키거나 변질시키거나 파괴하는 일에 나도 모르게 작용되고 있지나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거짓 교사란 다른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보다 어떤 자신의 선행, 경쟁심, 전통을 그리스도의 복음보다 앞세우는 자들입니다. 즉 그리스도 없는 선한 사람입니다.

또한 우리는 "목구멍이 포도청"이기 때문에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포기하는 경우를 허다히 봅니다. 재림도 심판도 없을 것이라는 실제적인 자유주의적 신앙으로 매일 매일을 삽니다. 더더군다나 그리스도의 재림을 고대하기는 커녕 없었으면 하는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신부로 우리들이 얼마나 준비가 부족한 가를 자인하는 말입니다. 또한 성경공부는 하지만, 참 그리스도인다운 절대헌신, 절대복종 없는 맥빠진 매일 매일을 사는 가운데 다리에 맥이 풀려 단지 100m도 뛸 수 없는 몰골이 된 자신들을 적나라하게 발견합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우리가 당면한 문제들이 없었을까요? 오히려 우리들보다 더 많은 난관이 있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목표로하여 중단없이 전진함으로 그리스도와 매일 매일 연합합으로 그래서 그리스도를 참으로 배움으로서 극복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중심하고 말씀과 기도, 친교와 증거의 삶과 순종의 테를 가진 하루하루라면 우리는 3장에 나타난 경고들을 능히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Number Title Reference
7 불가능이 없다고 한 사도 바울 빌립보서 4장 1-13절
6 제3과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는 사도바울 빌립보서 3:1~21
5 제2과 너희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빌립보서 2:1~30
4 제1과 고난중에서도 기뻐하는 사도바울 빌립보서 1:1~30
3 준비공부 문제지
2 빌립보서 서론
1 빌립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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