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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과 고난중에서도 기뻐하는 사도바울
빌립보서 1:1~30
본문: 빌립보서 1:1~30
요절: "너희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르실 줄을 확신하노라" (6절)

서론:

친애하는 젊은 선교회 형제 자매 여러분,
다음 몇주간 신약 성서의 서간문들 중에서 가장 감미로운 사랑의 편지요 기쁨의 편지인 빌립보서를 공부하게 된것을 참으로 기쁘게 생각합니다.

우리들이 이미 서론에서 살펴 보았듯이 이 편지는 사도바울이 1900여년전 옥중에서 쓴 편지입니다. 그는 옥중에 있었기 때문에 잊을 수 없는 유럽 전도의 첫 열매인 빌립보 교회를 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편지를 썼습니다. 오늘 배울 제1과의 제목은 "고난중에서도 기뻐하는 사도 바울"입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2절부터 33절을 보면 사도 바울의 고난으로 점철된 삶의 한 단면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기뻐했습니다. 왜 기뻐할 수 있었는가 하는 사실을 다음 몇 가지 사실로 구분하여 살펴 보겠습니다.

1) 사도 바울의 그리스도에 대한 자세
2) 사도 바울의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 대한 자세
3) 사도 바울의 복음선포에 대한 자세
4) 사도 바울의 삶과 죽음에 대한 자세
를 연구할 때에 우리에게도 같은 기쁨이 흘러 넘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들은 환경에 따라 기쁨이 변합니다. 많은 영적 침체를 경험합니다. 이러한 문제의 해결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기를 원합니다.

본론:

I. 사도 바울의 그리스도에 대한 자세

1.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1,2절)

요즈음은 편지를 쓸때 맨 마지막에 발신자 이름을 씁니다. 그러나 사도바울 당시에는 편지 쓰는 법이 오늘날과 달랐습니다. 이름을 첫 머리에 쓰고 주소와 인사의 순서가 뒤따랐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발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는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라고 서두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 선생님은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종"이라는 말 속에서 사도바울의 그리스도에 대한 자세의 일면을 보게 됩니다. 그는 그리스도 앞에서 최대의 겸손과 봉사의 일생을 살았습니다. 사실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에 의하여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임명을 받았습니다. 사도라는 말이 참으로 자랑스러운 호칭임에도 불구하고 "종"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했습니다. 종은 주인이 산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의지와 자유가 없습니다. 주인의 재산이기 때문에 종에게는 자신의 몸이나 정신이 없는 것처럼 살아야 하는 사람입니다.

이 서두 속에서 사도 바울이 누구에 의하여 움직여져 왔는가 하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피로 값주고 사셨습니다. 그의 죄와 율법의 아집으로부터 그를 구하셨습니다. 그는 사탄의 종으로부터 그리스도의 종으로 돌아섯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그의 생명과 생활을 지배하는 분이요, 인도하는 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주소는 "그리스도 안"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이 바로 그의 현주소요, 그가 있는 곳이면 언제나 주님이 함께 하셔서 그를 지배하셨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에 있을 때나, 로마 감옥에 있을 때나 시간과 공간의 변화에 관계없이 그리스도 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그리스도와 관계는 어떠합니까?
한편, 사도바울은 자신뿐만 아니라 그의 믿음의 아들 디모데도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라고 불렀습니다. 디모데와 바울은 동격이 될 수 없는 관계라고 우리들은 생각합니다. 연령적으로나 신앙생활의 경력으로나 큰 차이가 나는것이 사실입니다.

사도바울이 그렇게 겸손해진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그 대답은 간단합니다. 둘다 주님이 먼저 찾아 오셔서 값 없이 구원한 사실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같은 주인의 종일 뿐입니다. 그리스도 앞에서의 이러한 자세를 통해서 우리가 엿볼 수 있는 것은 사도바울 자신이나 디모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만이 전적으로 중요한 분임을 강조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쁨으로 봉사하는 비결이요, 그리스도와 동역자들 앞에서 최대의 겸손으로 살 수 있었던 비결입니다.
우리들이 그리스도께 모든 주의를 집중할,때, 그분만을 높일,때 우리는 참으로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물론 동역자들과의 관계가 가능해 집니다.

이 편지는 빌립보에 사는 "성도"들에게 보낸 것입니다. 성도란 특별한 신자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성도라는 말은 "구별된 사람", 거룩해진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성도란 하나님을 봉사하기 위하여 이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사람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산 봉사를 위해 바쳐진 존재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바쳐지는 것이어야 함을 "성도"라는 호칭,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구별되어 있습니까?
우리의 생활이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끊임없이 바쳐지고 있습니까? (롬12:1)
이러한 생활의 비결이 어디에 있습니까? 공동,번역 성서를 보면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성도들"이라고 했습니다. 구별된 사람, 바쳐지는 삶이 되는 비결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합니다 (요1:13).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성도가 될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보혈과 그의 능력으로만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된 사람들의 삶속에는 은혜와 평강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보았습니다. 동역자도 그리스도 앞에서 같은 종으로 보는 겸손이 있었습니다. 빌립보 교회의 교인을 성도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언제 어디서나 그리스도 안에 있었습니다.


II. 사도바울의 빌립보 교회에 대한 자세

1. 감사하며 기도로 교통하는 바울 (5,7절)

사도 바울은 감사함이 가득차고 넘치는 분이었습니다. 무엇으로도 빼앗을 수 없는 기쁨이 있는 분입니다. 사도 바울의 서신중 갈라디아서를 제외하고는 모두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3~5절을 볼 때 빌립보 교회를 생각하며 기도할 때마다 감사의 마음으로 가득차 있엇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사도 바울을 환희에 차도록 한 일이 무엇입니까? 5절을 보십시오.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고 개역성경은 기록하고 있으며 공동번역 성경은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믿기 시작한 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복음을 전하는데 협력해 온것"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소망 없고 권위 의식에 사로 잡히고 방종과 이방종교로 찌든 그들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일에 참여하게 된것입니다. 이런 빌립보 교회를 생갈할 때마다 그는 감사의 기도를 끊임없이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대부분의 크리스챤은 기도하는 일에 게으릅니다. 감사보다는 갈등이요, 결핍을 되뇌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아니면 감사하지 않습니다. 특히 복음의 진전이나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 사실에 대하여 "감사하다", "참으로 기쁘다"고 말하는 사람이 적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복 때문에 감사한 것이 아닙니다. 빌립보에 일어난 복음의 역사 때문에 기뻐한 것입니다.

오늘날 크리스챤은 고독 가운데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신앙인이라고 하면서도 이기적인 사리사욕에 지배를 받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에대한 관심이 점점 없어집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멧세지는 기뻐하는 자들과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는 이들과 함께 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복만 감사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주신 복을 위해서도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를 돌릴줄 알아야겠습니다.

2. 확신을 가지고 기도하는 사도바울 (6절)

5절과 7절 말씀을 통하여 빌립보 교회에 시작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기뻐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바울과 실라나 디모데가 세운것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는 하나님 이십니다. 6절 말씀을 볼 때 사도바울은 그들에게 시작된 복음의 역사만을 기뻐한 것이 아님을 발견합니다. 더 나아가서 그일을 끝까지 이루시기로 약속하신 것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믿음의 역사를 시작하실 뿐만 아니라 완성시켜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들은 이 세상을 생각할 때에 도저히 이겨 나가기 힘든 조건들이 있습니다. 우리들의 믿음 또한 약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강합니다. 로마서 8장 39절을 보면 "아무것도 우리를 우리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에게 있어서도 빌립보 성의 한 구석에 모인 소수의 교회를 생각할 때에 염려가 없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능력때문에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또한 그 "선한일이 이루어질" 그 시기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날은 언제 입니까? 그 날은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입니다. 영광중에 나타나시어 그의 신부인 교회를 맞이하러 오시는 날입니다. 그날은 죄와 마귀를 이기시는 그리스도의 마지막 승리의 날입니다. 그날에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안에 구원의 역사를 완전히 이루실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확신이 있었으므로 감옥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3. 섬세하게 기도하는 사도바울

우리가 잘아는대로 사도 바울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9절부터 11절 말씀을 보면 빌립보 교회를 위하여 기도해온 중요한 제목들이 있습니다. 로마옥중에서 재판을 기다리는 그로서 빌립보 교회를 가장 잘 돕는 비결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위해 기도한 제목들은 무엇입니까?

i) 풍성한 사랑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랑이 참된 지시과 삶의 경험에서 얻어진 분별력을 통하여 풍성하게 되도록 기원했습니다.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단지 사랑을 실천해 보는 것만을 위하여 기도한 것이 아니라, 높이 물결쳐 오르는 파도처럼 풍성해 지기를 구했습니다. 우리들은 믿음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남북통일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그외에도 기도할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이러한 믿은이라 할지라도 무슨 가치가 있습니까?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사도 바울은 말했습니다. 우리는 모든 은사중 가장 귀한 풍성한 사랑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사랑은 지식과 총명 안에서 풍성해집니다. 우리는 날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자라나야 하겠습니다. 이 말은 날마다 그리스도를 닮아간다는 말이요, 그리스도와 함께 행한다는 말입니다. 이 지식에 총명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지 않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어떻게 악에 민감하게 저항할 수 있는 분별력을 기를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사랑외에는 그 어느,것도 우리를 악에 민감하게 만드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사람은 사탄과 교제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깊을 수록 그리고 하나님과 더 깊이 교제할 수록 선과 악을 불별하는 능력이 비례합니다.

ii) 진실과 의의 열매가 있기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사도,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풍성한 사랑을 갖게될,때 진실(순결과 성실)하며 나무랄데 없는 성숙한 열매를 맺는 성도가 될,것이라고 했습니다. 순결이라는 말은 다른것이 혼합되지 아니한 순순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불순한,것, 교만과 시기와 증오의 죄등이 우리의 삶,속에 있으면 있을수록 사랑은 불결해지며 열매는 벌레먹습니다. 우리들의 생활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어 심판하실 그날을 위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겠습니다. 언젠가는 우리의 순수성과 순결이 시험받게 될것입니다. 10절 말씀처럼 "순결하고 나무랄데 없는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의 날을 맞이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11절에서 사도바울은 "의의 열매가 가득하기를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기독교인의 생활은 소극적인 생활이 아닙니다. 오히려 적극적인 삶이요 열매를 맺는 삶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 선생님이 이상의 모든 기도에서 구하는 모든 것의 결론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영광과 찬양이 도외시된 사랑이니 순결이니, 의의 열매니 하는 말은 한갖 말장난에 지나지 않습니다.

III. 사도바울의 복음전파에 대한 자세 (12~18,27~30)

1. 환경을 극복한 사도바울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지보가 된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그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형제중 다수가 나의 매임을 인하여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느니라" (12~14)

빌립보 교회는 사도 바울의 일을 염려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유죄 선고를 받을 것인가? 무죄 석방되어 다시 만게 될 것인지를 걱정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혹시 복음 전파 사업에 큰 손실이 있음을 안타깝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감옥에 갇힌 것이 어떻게 복음 전파에 도움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사도바울은 12절에서 자기를 염려해주는 빌립보 교회에 대답하고 있습니다.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되었도다"라고 했습니다. 그가 옥에 갇힘으로서 복음 전파에 방해가 된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복음은 실제적으로 더 진보한 것입니다. 그가 옥중에서도 크게 기뻐할 수 있는 것은 그 속에서도 복음을 전파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도 잊고 자기 사정도 잊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오직 한가지 목적이 있었습니다. 즉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파하기 위한 것으로 충만했습니다.

인도에서 젊음을 불태우다가 죽은 유명한 선교사 헨리 마틴(Henry Martin)은 "오! 이제 나를 하나님을 위해서 물태워 주업소서"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와같은 복음 전파의 열정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혼란된 나라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생명의 말씀을 이 나라에 전파하는 임무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 생명의 말씀이란 곧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사실을 증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그리스도인의 임무입니다.

13절과 14절에서 사도바울은 자기가 감옥에 있는 동안에 그리스도가 잔파되는 두 가지 일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첫째 방법은 13절에 있습니다.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밤낮 쇠고랑을 찬 사도바울은 시위병의 감시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가는 곳이면 언제나 감시자가 동행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면회자들이 왔을 때도, 기도할 때도, 잠잘 때에도, 말할 때, 성경을 읽을 때 다 감시했습니다. 시위병들은 사도 바울의 경건과 사랑과 온유함을 잘 보았습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용기와 충성을 보았습니다.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런 감동을 다른 시위병들에게 말했을 것입니다.

14절에서 사도 바울은 자기가 감옥에 있음으로해서 복음이 전파된 둘째 방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형제중 다수가 나의 매임을 인하여 주안에서 신뢰함으로 겁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느니라"
사도 바울이 감옥안에서 증거함으로써 바울이 갇혀있는 로마시의 기독교인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사도바울의 담대함을 보고 더욱 격려를 받아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하기 시작했습니다.

로마에는 사도 바울이 그곳에 이르기 전에 벌써 교회가 있었습니다. 이 교회는 복음 선포의 기수가 체포된 사실 때문에 겁이 났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감옥안에서 용감하게 증거하는 것을 볼 때, 간수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는 소식을 들을 때, 그들은 담력을 얻어 확신을 가지고 주님을 증거하게 되었습니다. 사도바울의 옥중 전도는 복음의 진보에 보이지 않는 활력소가 되었습니다.

2. 그릇된 동기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

사도 바울은 로마에서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두 부류가 있다고 했습니다. 한 부류는 투기와 분쟁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사도 바울을 시기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명예와 명성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복음 전파를 수단으로 사용하여 바울을 화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했습니다. 17절에서는 "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한다"고 했으며 18절에서는 "외모로 전파한다"고 하셨습니다. 이들은 친 그리스도적이지만 반 바울적입니다. 이 사람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충만해서 전파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해서 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서 내가 기뻐하고 기뻐하노라"하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람이면 자기 자신에 대하여 반대하고 비방하더라도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있습니다.

또 한편의 부류는 사도 바울을 사랑했습니다. 이들은 사랑을 가지고, 착한뜻을 가지고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자기들과 별 안면이 없는 바울이지만 사랑했습니다.

3. 빌립보 교회가 취할 입장(27~30)

27절부터 30절까지를 보면 사도 바울의 믿음의 동역자인 빌립보 교회에 대한 간절한 기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이 복음을 받은 사람다운 생활하기를 권면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반대하는 큰 도시에 살고 있습니다. 악령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많습니다. "합당하게 생활하라"는 말씀은 "너희 시민권을 가치있게 사용하라"는 뜻도 있습니다. 빌립보는 로마의 퇴역 노병들을 위하여 조성된 도시로서 많은 특권을 누리고 있음을 이미 배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고백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 시민권을 하늘에 둔 사람처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골3장). 빌립보 사람들은 자존심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성도의 특권은 이보다 더 큽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특권은 책임이 따릅니다. 복음이 그 마음에 심어준 은혜를 외적으로 나타내는 생활이어야 합니다. 기도보다 육신적인 쾌락을, 성경보다 다른 책을, 하나님의 일보다는 세상의 다른 일들을 더 사랑한다면 우리는 하늘 나라의 시민권을 합당하게 사용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다음으로 사도바울은 "일심으로 서서"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모든 교인들이 "일심"으로 서서 악한 사탄과 싸우기 위해서는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야 합니다. 성령님은 성도들을 고난 가운데서도 튼튼하게 세웁니다. 우리 젊은 선교회의 회원 한사람 한사람은 일싱으로 서서 복음의 진보를 이루기 위하여 사탄과 싸워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더 넓은 영역을 차지하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떳게 일심으로 설 수 있습니까? 28절 말씀을 보면 "대적하는 자를 두려워 하지 말아야"합니다. 우리들이 원수를 보고 놀라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위해 싸우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승리할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공동번역 성서를 읽어보면 "그들에게는 멸망의 징조가 되고 여러분에게는 구원의 징조가 될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죄와 마귀에 대항하여 싸우는 것은 복음의 원수들의 운명을 정하는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가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는일, 일심으로 서서 협력하는일, 두려움 없이 용기가 있어야 한다면 우리들은 어떻겠습니까?


IV. 사도바울의 삶과 죽음에 대한 자세

사도바울의 생애가 거룩한 열정, 숭고한 용기로 점철될 수 있었던 열쇠가 어디있습니까? 그 비결은 20절을 통하여 찾아 볼 수 있겠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느니라"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죽던지 살던지 그리스도가 찬양을 받으면 만족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고난에 대한 기쁨의 비결 즉 그리스도를 인하여 고난받는 비결이 있습니다.

"이는 내가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21절)
사도 바울이 이 말씀을 쓸때에 불분명한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죽어도 기쁘고 살아도 기쁩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의 삷이나 죽음에 의미를 부여해 주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죽음을 유익하게 보았습니다. 사실 죽음은 어둡고 음산하고 멸망적인 것입니다. 죽엄은 경험을 단절시키고 의식을 단절시킵니다. 불쾌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에게 있어서는 죽음은 발전이요, 이로운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죽엄은 사도 바울로 하여금 주님 앞에 더 가까이 나아가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면류관 받을 것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고통없는 순수한 기쁨의 생활이기 때문입니다. 어려분은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버마의 사도 아도니람 져드슨은 죽을 때 이런말을 했습니다. "나는 학교로 가는 아이처럼 기쁜마음으로 간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아주 평안하다."

D.L.무디선생은 "나는 이세상이 멀어져 가는 것이 보입니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이 부르신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승리의 달음질을 했기 때문에 승리의 죽음을 맞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주저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형제들을 돕기 위해서였습니다. 24절 말씀을 보면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다"고 했습니다. 그는 개인의 바래임보다 동역자들의 유익을 생각했습니다.
그는 동역자들의 믿음을 발전시켜 주고 기쁨을 더해줄 수 있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서로의 만남을 통하여 그리스도 예수를 더욱 자랑할 수 있기를 원했습니다.
우리들은 죽음과 삶 양쪽다 자신이 없습니다. 둘다 두려울 때가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결론:

우리는 제1장을 통하여 왜 사도 바울이 고난 중에서도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 있었는가를 살펴 보았습니다.
우리들이 주님의 일을 하지만 진정한 기쁨이 없이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의 해답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복음역사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확신의 근거가 무엇이며, 이 복음의 사역자들이 가져야 할 사생관, 협동심 그리고 성품들을 살펴보므로서 '민족 복음화와 세계 선교'의 일꾼이 되어야 할 우리들의 개인적, 단체적 결함이 무엇인가를 비추어 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처함 복음의 환경이 심히 어려웠지만 오히려 복음 전파의 기회로 역전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일할 이 땅, 또는 환경이 꼭 옥토만은 아닙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꿈이 없습니다. 따뜻한 사랑이 없습니다. 신뢰의 바탕이 미약합니다. 민족과 세계의 주인의식이 없이 손님으로서 물질과 쾌락의 노예로 사는 모습을 수없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실로 이 민족의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민족의 가슴을 점령해야 할 때인줄 압니다.

◈이러한 때 당신은 환경 탓만 합니까?
◈당신의 생활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전파됩니까?
◈당신을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여 말씀을 증거하며 삶과 죽음의 문제도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여 바칠 각오가 있습니까?
없다면 왜 그럴까요?

Number Title Reference
7 불가능이 없다고 한 사도 바울 빌립보서 4장 1-13절
6 제3과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는 사도바울 빌립보서 3:1~21
5 제2과 너희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빌립보서 2:1~30
4 제1과 고난중에서도 기뻐하는 사도바울 빌립보서 1:1~30
3 준비공부 문제지
2 빌립보서 서론
1 빌립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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