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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과 너희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빌립보서 2:1~30
본문: 빌립보서 2:1~30
요절: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으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자 자기 일을 돌아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너희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1~5절)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도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나로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15~16)

"저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 (30절)

서론:

우리는 제1과를 통하여 유럽 전도의 첫 열매인 빌립보 교회에 대한 사도 바울의 감사편지의 첫 부분을 연구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기쁨으로 옥중 생활을 할 수 있었전 이유는 그리스도와, 성도와, 복음 선포와, 삶과 죽음에 대한 바른 자세에 있었음을 살펴 보았습니다.

오늘 공부할 말씀은 악하고 어그러지는 세상에 빛들로 나타날 빌립보 교회를 약하게 만드는 다툼과 허영대신 겸손과 순종을 강조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하는 구체적인 예를 들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왜 우리는 겸손히 하나가 되어야 하는가 하는 이유와 동역자들의 삶을 구체적으로 소개함으로서 실제적인 일치가 무엇이며 어떻게 표현되는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강의는
1. 우리가 품어야 할 마음
2. 우리가 가져야 할 신앙형태
3. 우리가 존귀히 여길 동역자들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말씀을 연구하고자 합니다.

본론:

I. 우리가 품어야 할 마음 (1~11)

1. 겸손과 일치 (1~4)

빌립보 교회는 여러 가지 훌룽한 미덕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교회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4장 1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나의 면류관"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그들이 복음 안에서 뜨겁게 교통함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그는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항상 간구함은 첫 날부터 이제까지 복음 안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가 그의 사역에 쓸 것을 공급해 주므로써 그들에게 감사하고 있습니다(4:16). 빌리보 교회는 복음사역에 따른 고난을 각오한 용기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리나 그 교회도 그릇된 점이 없지 않았습니다. 약점이 있었습니다. 2장1절부터 4절을 보면 사도바울 선생님이 겸손하여 하나가 되라고 간절히 권면하고 있습니다. 1장 마지막 부분(1:27~30)을 보면 사도바울은 교회가 합심하여 세상의 적을 대항할 것을 권고했습니다. 2장에서는 힘을 모아 교회내의 문제점을 분쇄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1장에서는 교회 밖에 있는 복음의 적에 대해서 경고하였고 2장에서는 교회안에 있는 적, 즉 복음의 멧세지를 방해하는 것에 관해서 경고하고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의 문제점은 무엇일까요?

분열과 반목의 조짐이 있었습니다. 마땅히 있어야 할 기독교인의 화합과 결합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바울은 결합을 호소하는 것입니다.
1절 말씀에서 사도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결합의 기초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을 한 가족으로 만들어 주는 그 이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은 어떤 사람이 일치를 주장한다고 연합되는 것이 아닙니다. 조직에 의하여 연합되는 것도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결합과 연합 또 일치는 하나님이 하여 주시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연합은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 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오는 것입니다.

1절에서 사도 바울은 연합의 근거 내지 이유를 네가지로 들고 있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권면이요,
둘째는 사람의 위로요,
셋째는 성령의 교제요,
넷째는 긍휼과 자비입니다.

이상의 4가지 말씀을 보면 크리스챤의 일치와 단합은 영적 근거위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으로 그리스도, 하나님, 성령님과 생동력 있는 연합을 이룰 때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인들을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위안을 받을 때 오는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신앙의 교통이 크리스챤을 하나되게 하십니다.(엡4:3)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주님을 믿는 일치한 신앙으로 말미암아 하나로 연합되는 것입니다. 많은 크리스챤들이 하나 되는 일을 열망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리스도의 용서를 경험한 공통적인 점이 없이 연합이 가능할까요?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성령의 역사와 감격을 모르면서도 일치할 수 있을까요? 기억합시다. 한 가지 사실만이 우리들의 일치의 근거입니다. 한 가지 사실이란 그리스도의 보혈이요, 성령의 역사요, 부활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가 씻기운 공통된 경험입니다. 만일 여러분에게 이러한 경험이 없으시다면 우리는 근본적으로 일치도지 못합니다.

한 마음, 한 뜻, 한 사랑을 품으라고 재차 강조한 사도 바울은 3절에서 겸손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연합과 단합을 깨뜨리는 것은 무엇입니까?

다툼이나 허영입니다. (3절) 공동 번역에서는 "이기적인 야심이나 허영"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연합이란 겸손과 겸양이 없이는 이루워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복음의 역사에 실질적인 적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자기만을 사랑하는 입장에서 일하는 사람입니다. 명예욕, 그리고 지위에 대한 욕구때문에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예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이런것과 반대되는 것이 겸손입니다. 겸손은 공자가 말하는 어떤 형식이나 관습이나 규칙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가운데서 이를 정의하고 있습니다. 겸손이란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입니다. 이 말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우리 모임에 한 형제가 있다고 가정합시다. 이 형제는 주일이 지나면 길모퉁이에서 "쥐포와 땅콩"을 판다고 합시다. 나는 큰 재벌의 그룹에 다닙니다. 겸손이란 길에서 장사하는 형제가 나보다 낫다고 여기는 마음의 태도입니다. 즉 우리의 겸손이란 우리 자신들의 약점을 강조하고, 다른 사람의 장점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남을 칭찬하고 자신을 책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찬양하고 자신을 낮추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 당시 전국에 잘 알려진 분이었습니다. 더러는 그를 메시야가 아닌가하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들으려고 모여들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인기가 절정에 다달았을 때,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라고 그의 제지들에게 권했습니다. 또 그는 말하기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우리들이 본받아야 할 겸손입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일치(연합)의 적은 다툼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우리가 그 다툼을 어떻게 없애 버릴 것인가 하는 그 방법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4절). "각각 자기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볼 때 우리들의 생활은 남을 도와주는 것으로 충만해야 하며, 우리 자신들만을 위해서 중만해서는 안됨을 볼 수 있습니다. 겸손이란 다른 사람에 대한 봉사를 요구합니다.

2.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을 보이신 예수님 (5~7)

유교에서 삶의 성공적인 비결은 사람을 사귀는데 있어서 겸손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삶의 이상적인 길을 道(도) 라고 합니다. 이 도(길)는 성실과 겸허를 뜻합니다. 겸손은 미덕이요 겸손은 이웃에게 기쁨을 줍니다. 그런데 점차 이 미덕이 세상에서 사라져가고 P.R시대가 되고 있습니다. 어떻게 겸손한 나라, 사회, 모임을 만들 수 있을까요? 사도바울은 이렇게 대답하고 있습니다. 겸손의 비결을 회복하는 길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2장 5절부터 7절을 읽어봅시다. 사도바 울은 5절에서 마음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을을 품으라"고 말합니다. 그 마음은 겸손함 그리스도의 마음을 말합니다(3,4절 참조). 이 마음을 어떻게 가질 수 있습니까? 어떻게 행동화 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산 本(본)을 보아야만 합니다. 그리고 실습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자동차 운전을 배우고자 할 때 운전에 대한 책이나 말만으로는 배울 수 없습니다. 더 나아가서 교사가 가르쳐 주는 본을 따라 실습해 봄으로써 배웁니다. 겸손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좋은 설교나 실제적인 겸손을 듣는다고 해서 겸손을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자신을 잊어버리는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크리스챤은 겸손과 자기 부정의 본을 따라 매일 매일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죄인들을 위하여 속죄의 제물이 되신 그리스도는 누구십니까(8절)? 사도 바울은 6절에서 "하나님의 본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볼 때 예수님은 하늘의 영광과 명예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시어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의 신성을 포기하신 것이 아닙니다. 단지 그의 신성에 따르는 영광과 명예를 버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과 동등됨을 조금도 생각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죄인들을 위하야 자신을 돌보시지 않으셨습니다. 만일 이것이 우리가 따라야 할 본이라면, 우리는 자기 희생을 하는데 무엇을 가리겠습니까?
이웃을 위하여 자기 자신을 부인하는 이것이 겸손이니다. 이것이 공자의 제도적 겸손이나, 석가의 자신의 유익을 위한 겸손과는 질적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이런 겸손을 가질 수 있다고 봅니까? 참된 겸손은 하나의 근원밖에 없습니다. 그 유일한 근원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의 사랑가운데 녹아질때 까지는 결코 자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3. 지극히 높임을 받으신 예수님 (8~11)

예수님은 최대의 겸손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9절부터 11절의 말씀은 이 겸손이 가져다준 영광과 환희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신이 스스로 겸손해지신 예수님을 하나님은 "지극히"높이셨습니다. 십자가 위에 돌아가신 예수님은 지금 전 우주를 통치하십니다. 만물을 다스리십니다 (엡1:20 참고). 하나님께서는 왜 수치와 저주스러운 십자가의 형벌 다음에 그를 높이셨습니까?
9절의 첫 머리를 보면 "이러므로"라고 한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이 일이 즉 주님의 영광스런 명예의 회복이 왜 일어났는지에 대한 이유를 말해줍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지금까지 말한 (2:5~6) 그리스도의 겸손을 지적한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겸손을 높이시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높이신 것은 구속 사업의 희생에 대한 하나님의 상이었습니다.

언젠가 우리도 하나님 앞에 높임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높임과 그리스도의 지극히 높음에는 구별이 있을 것입니다 (히4:13,7:26, 엡4:10). 예수님은 우리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11절).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주"라고 했는데 이말은 그리스도의 본체와 존재를 표현합니다. "주"라는 말은 성경가운데 하나님 자신에 대한 묘사로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로마서 10정9절을 보면 예수를 "주로 시인하지 않으"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라는 말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한 본체시요, 왕중 왕이요, 주의 주이시기 때문에,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서 있으나 큰 위로와 힘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모든 투쟁과 고난가운데 처해있는 빌립보 교인들을 위한 힘이 있는 것입니다.

10절을 보면 예수님의 우주적인 영광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피조물이 엔젠가는 우리의 주이신 예수님께 충성과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라는 우주적 사건을 약속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오스왈드 스탠글러는 그리스도의 제자는 아니었지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를 모든 종교위에 높이는 유일한 사실은 곧 예수라는 인물이다. 기독교는 세계사에 있어서의 하나의 종교인데 여기에서 한 사람의 운명이 전 피조물의 중심이 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빵을 굽는 사람에겐 예수님은 산 떡이 되시며, 과학자에게는 생명과 진리가 되시며, 의사에게는 양약이 되시며, 보석상에게는 값진 보석이 됩니다. 신문기자에게는 기쁜소식이, 철학자에게는 하나님의 지혜가 되시며, 설교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십니다. 노동자에게는 안식을, 종에게는 선한주인이 되십니다. 우리들에게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세주이시요, 주님이십니다.

II. 우리가 가져야 할 신앙형태 (12~18)

1. 두렵고 떨림으로 (12,13)

신년 벽두가 되면 어떻게 새 해를 잘 보낼 수 있을까 고샘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새 결심과 새 계획을 세웁니다. 우리들이 지난해의 신앙 생활을 반성할 때에 영적 약점이 많았습니다. 주님을 잊을 때도 있었습니다. 우리의 뜻대로 행했습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신앙을 어떻게 부흥시킬 수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본문12절과 13절에서 기독교인의 생활에 명백한 방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의 생활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그러한 생활을 할 수가 있는가 하는 방법을 제시합니다. 12,13절을 읽어봅시다. 사도바울은 기독교인의 생활의 근원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의 생활은 어디서 시작하는 것입니까?

12절 말씀을 보면 "그러므로"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중요한 것입니다. 전 귀절과 본 귀절의 사이를 관련짓기 때문입니다. 5절~11절까지 사도바울은 죄인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역사를 묘사했습니다.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님, 우리의 죄를 씻기신 예수님이요 만유에 뛰어나신 예수님 이심을 이미 공부했습니다. "그러므로"라는 말은 예수님처럼 우리 자신을 버리고, 그리스도에게로 돌아가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즉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자신이 죽을 때부터 시작됩니다.(갈2:20)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 Davinci)가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 그림을 거의 완성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친구를 데리고 와서 그 그림을 보여주면서, 이 그림가운데서 무엇이 가장 뚜렷하게 나타났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 친구는 "컵"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다빈치는 "나의 그림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보다 더 주의를 끌어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하면서 붓으로 그 컵을 지워버혔다고 합니다.

우리들도 바로 이러한 입장에서 한 해를, 한 달을, 한 주를 그리고 하루를 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삶의 시작을 그리스도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신앙의 대상도 그리스도요, 신앙의 중심도 그리스도요, 신앙의 뜻과 목표도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성질을 계속해서 묘사하고 있습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아"는 말씀입니다.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성경중 다른 곳에서는 인간이 그 자신의 힘으로는 구원을 이룰수도, 성취할 수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행위로 구원 받지 못함을 누누히 강조했습니다. 그러면 이 귀절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모든 것을 행하셨다고 말하는 멧세지와 어떻게 조화가 되는것입니까?

이 문제의 해답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구원"이란 말이 성경에서 여러가지 뜻으로 사용되는 때가 더러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어떤 때는 "구원"이란 죄와 슬픔에서의 취종적인 해방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단순히 죄에서 해방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이런 의미에서 생각할 때, 자신의 구원을 이룰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의 과거나 미래의 문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에 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가운데서 매일 계속되고 있는 죄의 권세에서의 점진적인 해방에 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성화의 단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22~23절에서 이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를 닮기 위하여 끊임없이 분투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현재의 성장은 과거의 구원과 미래의 완전한 구원을 잇는 가교입니다. 구원의 한 부분입니다. 만일 우리가 성장하지 않는다면 구원의 진가를 무시하는 일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나무에 비교할 수 있습니다. 나무는 자랍니다. 어린 아이는 자랍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될 때 그는 성장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병들었거나 죽은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신앙에 대해서 많은 말을 하기도 하고 일도 합니다. 그러나 신앙을 현재의 삶속에 이루지 않습니다. 열매가 없습니다. 성화의 삶은 어떤 환경에서도 계속되어야 하는 것이요, 그리스도인은 꾸준히 성장을 해야 합니다.

12절 상반을 보면 "너희는 항상 순종했거니와 내앞에서만 아니라, 지금 내가 없을 때는 더욱 더 그리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들과 함께 있을 수 있는 형편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를 으지할 수도 없고 의지해서도 안되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해야 합니다.
이제는 두려움과 떨림으로 자기들의 구원을 이루는 것이 더욷 더 중요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 의하여 빌립보 교회가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빌립보 교회 교인들의 그리스도에 대한 반응이 그 교회를 강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은 결코 쉬운일은 아닙니다. 역사도 짧고 아직도 약한 교회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없으면 그 교회는 중지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끊임없는 성장이 오히려 강력한 단합이 요청되는 때가 아니겠습니까?
형제 자매여러분!
우리는 지도자를 자주 만날수 없는 때일수록 계속 성장해 나가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친구들이 대적하고 비웃을 때 일수록 우리는 두려움과 떨림으로 우리 구원을 이뤄야함을 잊지 맙시다. 우리는 날마다 그리스도로 옷입고 肉의 역사들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본문은 공포와 낙담과 암흑가운데서 행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항상 빛과 기쁨과 평화의 자녀여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여기서 주신 권면은 우리 자신들이 보잘것없이 약하다는 것을 기억하고 하루, 한시간을 거룩되아 살라는 말씀입니다. 신앙생활에서 하나님 앞에서의 떨림과 두려움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요 그리스도는 모든 것이라는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두려움과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는데는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거룩한 신앙과 열성을 가지고 성장하는데는 원인이 있습니다. 그 원인이 되는 것은 곧 하나님이십니다.

13절을 보십시오."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했습니다. 궁극적으로 인간에게 거룩한 의지를 주시는 분은 곧 하나님이십니다. 소망을 가지고 행하게 하는 것은 믿는 사람안에서 계신 하나님의 역사의 열매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 안에 역사하시지 않으셨다면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하고 새로운 마음을 주실 때라야 우리는 성장합니다. 우리 안에서 좋은 일을 시작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능력과 목적을 주는 힘이 되어주십니다. 죽은 막대기를 가져다가 생명있는 나무로 만드시는 이는 그리스도이십니다. 냉냉한 마음에 힘을 불어 넣으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도 새로운 마음을 주셨습니까?
당신은 하나님의 권세를 힘입어 거룩하게 성장하고 있습니까?

2. 생명의 말씀을 밝히라 (14~16)

성서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불평하면서 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자발적이고 기쁘게 하는 순종입니다. 사도 바울은 14절에서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순종은 우리를 위하여 기쁘게 항복하는 것입니다. 이 귀절의 처음이 어떻게 시작되는지 주의해 보십시오. "모든 것"이란 말로 시작되어있습니다. 헬라어에서는 강조하는 말을 맨처음에 둘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이 명령하는 것은 모두 완전히 순종되어야 합니다. 전 생애를 즐거움과 기쁨으로 순종하는 삶입니다. 놀라운 도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유쾌할 때와 마찬가지로 고통가운데서도 기쁘게 순종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이것을 "모든일"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몸이 병들고 더 이상 일을 할 수가 없고, 아내가 병들고, 부양 가족이 있을때라도 우리는 기뻐할 수가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고 했습니다. 원망은 의지적인 행동입니다. 그 의지는 불평이라는 수단을 써서 어떤 것에 반항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만날 때 우리의 뜻을 제어하고 원망대신 기쁨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시비"는 의지를 나타내는 행동입니다. 그러나 의지는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온갖 논쟁과 반대와 비난을 일으킵니다. 우리는 "시비없이 원망없이" 순종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에 대한 비난에서 원망에서 기쁨과 찬성으로 돌리십시오. 구약 성서를 보면 하나님의 백성이 지은 가장 큰 죄중의 하나는 원망과 시비였습니다. 음식이나 물 때문에 그외의 여러방면으로 40년 광야생활에서 불평했습니다. 그 결과들을 기억하십니까?
원망과 시비는 큰 죄중의 하나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표지는 원망과 시비가 아니라 기쁨의 순종이요, 절대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시대를 통해서 원망밖에 없었던 곳에 기쁨을 가져다 주십니다. 고통밖에 없었던 곳에 기쁨을 주십니다.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많은 나라를 다녀보았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곳에서는 행복하고 희망에 찬 얼굴을 한 사람은 단 한사람도 본일이 없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계신 마음의 성에서 날리는 깃발입니다. 당신은 이러한 마음을 가지셨습니까?
이 기쁨은 예수 그리스도께 완전히 사로잡힌 의지에서만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만을 생각하는 마음에서만 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15절과 16절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뜻에 기쁘게 순종하는 목적이 무엇인가를 말해줍니다. 그리스도인의 본을 통해서 바울이 기쁨의 근원을 다른사람에게 전하는 것에 그 목적이 있습니다.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바꾸어 말해서 증거의 무리로서, 우리를 위해서 하신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되도록 하기 위해서 기쁘게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는 흠이 없고 순전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에는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0장16절에서 "비둘기같이 순결"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일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적의로 가득찬 세상과 도덕적으로 비뚤어진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세상은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에 대하여 무관심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세상을 가리켜 교회의 원수라고 했습니다. 세상은 복음을 부정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동떨어진 이 세상에서 우리는 흠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이 말은 우리가 산이나 인간이 없는 곳에 격리되라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일터는 세상입니다. 그리스도를 효과적으로 증거할 수 있는 곳은 세상이여야 하며 그 방법은 흠없는 삶과 기쁜 순종에서 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요즈음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와 세상과의 차이점을 발견하기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이 거룩한 공동체가 부패한 경우도 봅니다. 권력을 요구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하는 경우도 봅니다. 순결치 못하고 어둡고 불결한 것을 볼때도 있습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마치 세상에 속한 사람처럼 삽니다.

본문말씀을 보면 우리들이 세상의 빛들로 나타나기를 원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15절 16절에서 우리는 진리의 횃불이요, 우주의 별들로서 이세상에서 영적 도덕적 별들로서 어두움을 쫓아버려야만 하는 자들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늘을 비치는 별들처럼 우리는 사람들의 가슴과 생활을 비춰야 합니다. 우리는 창조주를 전파하고 또 구원의 기쁨을 선포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생명의 말씀을 밝히는 일"에 전념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 저희 젊은 선교회 회원 한사람 한사람의 삶이 생활로, 임으로, 사랑으로 생영의 말씀을 밝히는 이 시대의 별들이 되게 하소서!
세상에 우리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볼 수 있도록 힙씁니다. 생명이신 말씀을 밝힙시다.

3. 기뻐 드리는 제사의 생활 (17~18)

만일에 빌립보 교회가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의 역사를 계속 이뤄 나간다면, 만일에 저들이 계속해서 생명의 말씀을 밝혀 별처럼 빛난다면 그것은 곧 사도 바울의 기쁨의 이유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죽더라도 그런 일이라면 너무나 기쁘게 죽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위에 내가 관제를 드린다고 할지라도"라는 말씀속에서 그 뜻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의 헌신을 제물로 보았습니다. 그는 그 제물위에 자신의 피를 뿌리려는 것입니다. 그의 죽음으로 빌립보 교인들이 드린 예배가 극치에 이르도록 하고자 했습니다.

18절에서 그는 빌립보 교회 역시 기뻐하고 기뻐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 자기의 죽음에 대해서까지 기뻐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여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자기와 같이 기뻐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그는 하나님께서 빌립보 교인들을 위하여 바울 자신을 희생하도록 하신것 때문에 기뻐한 것입니다. 사도바 울은 교회의 신앙성장이 있다면 자기가 죽음에 직면한다 하더라도 기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기쁨의 원천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이루신 크신 일을 보므로, 믿음으로 찬양하고 예배하고 봉사함에 근거해야 하겠습니다.

요리문답 첫번째에 이런 말씀이 있음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 하는 것이니라" 바로 인생의 영원한 즐거움이 여기에 있습니다.

III. 우리가 존귀히 여길 동역자들 (19~30)

1. 신실한 디모데 (19~24)

사도바울의 서신을 살펴보면 사도바울의 주위에는 꼭 훌륭한 동역자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저들은 위대한 사역을 위하여 함께 모였습니다. 사도 바울을 사랑했습니다. 사도바울과 합께 일하기를 즐거워했습니다.

우리는 본문 말씀속에서 그러한 동역자를 만나게 됩니다. 그의 이름은 디모데입니다. 그는 사도 바울의 믿음의 아들이요, 친구요, 함께 군사된 자요, 동역자입니다. 19~24절을 보면 디모데에 관한 사도바울의 평가를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를 매우 신임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재판이 끝나는대로 디모데를 빌립보 교회에 보내어 소식을 전하고 빌립보 교회의 사정을 파악하도록 하고자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러한 중대한 사명을 왜 디모데에게 맡길 수 있었겠습니까? 이 젊은 동역자 디모데는 어떠한 사람입니까? 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헌신한 군사였습니다. 사도바울과 함께 고난에 동참했습니다. 본문에 들어가서 살펴보면, 첫재로 주목해야 할것은 디모데는 사도 바울과 같은뜻(마음)을 가진 분이었습니다. 둘째로 빌립보 교회의 일을 즉 복음의 역사를 진심으로 걱정해 주는 분이었습니다. 셋째로 자기일 보다 그리스도의 일을 앞세울 줄 아는 분이었습니다. 넷째로 그는 진정한 겸손과 사랑과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그 목적은 사도 바울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복음을 위하여서 입니다. 사도 바울은 특히 21절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도전해 오십니다. 사도 바울 당시에 그리스도인들의 많은 부류가 어떠했는가를 엿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사도바울이 같혀있는 로마시의 고참 그리스도인에 대한 제일 중요한 위치에 두지 못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자기들의 사적인 일과 이익을 더 많이 걱정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희생하는 것보다는 자신들의 생명을 더 아끼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일로 가득찬 그리스도인-
이 사람들의 마음은 세상과 그리스도인에게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기적인 현대판 그리스도인은 없습니까? 먹을것, 입을것, 쓸것, 군것질을 다하면서도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의 운영이나 병든자 가난한 자들에 대해서 무관심한 사람입니다. 다방에서 친구와 몇시간을 쓰는 것은 아까와 하지 않고, 친구 결혼식에는 한번도 안빠지지만 예배나 병든친구의 심방에는 한없이 시간과 열정이 인색한 사람입니다.

기억하십시다. 우리는 언제나 이기적인 생활의 가능성과 그리스도를 중심한 생활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디모데는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하여 이기적인 것을 버렸습니다. 그는 사도바울이 가는 곳이면 어디네나 , 보내는 곳이면 어디에나 갔습니다. 또 사도 바울이 남아 달라는 곳에서는 언제나 기쁜마음으로 머물렀습니다. (로마서 16:21)
그는 연령적으로 볼때 젊고 미숙했습니다. 육체적으로 건강하지 못했습니다.(딤전5:23) 겁이 많고 수줍은 사람이었습니다.(고전16:10)

그가 가진 약점이 아무리 많아도 그리스도편을 택한 그의 장점을 능가 할 수 없었습니다. 자기 자신의 일보다 그리스도의 일을 구함으로 모든 것을 극복했습니다. 그것이 디모데를 신실하게 했습니다. 그를 승리하게 했습니다.
웨일즈 지방에 대부흥이 일어났을때 한 청년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술주정뱅이 였습니다. 그는 회개한후 성실하고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그가 매일 가던 술집을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술집주인이 그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왜 혼자 그냥 지나가오?" 그 청년은 "저는 혼자가지 않습니다. 우리가 지나갑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해서 지나갑니다." 당신은 실제적으로 세상편입니까" 그리스도 편입니까?

2. 죽음을 무릎쓴 에바브로디도 (25~30)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사도 바울의 생애에 접촉된 에바브로디도의 생애의 일부분을 볼 수 있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아마도 빌립보 교회의 영적 지도자였던것 같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옥중의 사도바울에게 보낼 헌금을 그에게 맡겨 파송했습니다. 또한 에바브로디도는 바울을 돕고 시중드는 일을 했슴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을 섬기는 동안에 십한 병에 걸렸습니다. 그는 죽을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이것은 베드로나 스데반처럼 찬란한 성도도 아닌것 같아 보입니다. 그는 바울과 같은 사람이 못된다고 우리는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렇게 평가하실까요?

사도 바울은 그를 나의 동료요 전우라고 했습니다. 사실 이러한 따뜻하고 헌신적인 에바브로디도와 같은 그리스도인이 우리 모임에 많으면 많을수록, 자신은 감추고 다른 동역자들을 높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한알의 밀알이 되는 형제와 자매가 많을수록 하나님의 역사는 강력해 지지 않겠습니까? 저는 빌립보서 2장 가운데서 에바브로디도에 관한 부분을 읽을때 큰 감동을 받곤 합니다.

◈그는 시중들기를 즐겨했습니다.
◈그는 쓸것을 돕는 일을 즐겨했습니다.
◈그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몹시 보고 싶어 하면서도 자신의 일때문에 걱정할 것을 염려하고 있습니다.
◈목숨을 걸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일하다가 죽은 고비를 겪은 사람입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던진 분입니다. 그는 안일하게 살았던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지나친 봉사로 과로하고 결국 죽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기력을 모두 잃었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오늘날 하나님의 역사와 다른 그리스도인을 위한 희생을 모르는 많은 유약한 그리스도인들에게 경종을 울립니다. 에바브로디도는 한갖 평범한 그리스도인 이었다고 할지라도 그는 신앙의 용장이었고 진실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여!
동역자들이 돕는 영적 싸움은 즐겁습니다. 혼자서 악한 사탄과 싸워 이길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동역자들과 함께 힘을 모아 싸웁니다. 에바브로디도를 보십시오. 그는 비록 한 교회의 영적 리더에 지나지 않았지만 복음 진보에 얼마나 큰 활력소가 되었는가. 에바브로디도와 같은 동역자들의 헌신과 애정과 순종과 돌봄없이는 사도바울도 디모데도 존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젊은 선교회의 한 일원입니다. 여러분 서로 서로는 함께 영적 싸움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공동운명에 놓여있습니다. 나 한사람의 작은 희생이 모임의 큰 활력소로 나타난 것을 기억해 주십시오. 여러분 자신만을 위하여 싸우지 마십시오. 동역자들과 일치단결하여 사탄의 공격을 무력하게 만드십시오.

주님! 저희 모임에 에바브로디와 같은 형제와 자매들을 많이 허락해 주십시오.

결론: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가 외부적인 도전과 함께 겪어야할 내부적인 분열의 문제를 세심하게 권면하였습니다. 그는 빌립보 교회가 서로 사랑하고 겸손한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1~4)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랑과 겸손으로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5~11)

우리 젊은 선교회는 어떤 일에 소극적인 입장에서 시비곡절을 들어 비판하기보다 적극적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기를 힘써야 하겠습니다. 그 때라야 우리는 일치 단결된 신앙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습니다. 서로 나보다 남을 앞세우고, 우리보다 주님을 앞세울 때 우리는 연합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그러지고 음란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구원을 완성하기 위하여 애쓰는 성화의 삶이 어리석어 보일 때가 많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들은 한시라도 구원의 완성과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일과, 무엇보다도 생명의 말씀을 밝히는 사명에 대한 긍지가 요청됨을 언제나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의 복음전파 사역이 어려웠더라도 죽도록 충성한 에바브로디도와 모든 일을 조용히 끝내주는 디모데와 같은 동역자가 있었기에 사도 바울은 기뻤습니다.

주님!
저희 모임에 일치와 겸손의 중요성을 갚이 인식하여 주님의 길을 따르는 형제 자매들을 계속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들을 통하여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옵소서. 목음이 진보되게 하소서.
주님! 이분들이 자기일을 구하고 그리스도의 일에는 눈이 먼 자들이 되지않도록 끝까지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Number Title Reference
7 불가능이 없다고 한 사도 바울 빌립보서 4장 1-13절
6 제3과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는 사도바울 빌립보서 3:1~21
5 제2과 너희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빌립보서 2:1~30
4 제1과 고난중에서도 기뻐하는 사도바울 빌립보서 1:1~30
3 준비공부 문제지
2 빌립보서 서론
1 빌립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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