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감사, 또 감사 !
오늘 제가 숨쉬고 살아 있다는 것은,
인생의 갖은 실패와 풍파 속에서도 넘어지지 않도록 제 삶의 뿌리를 자신의 뿌리에 얽어매어 지탱해 주신 분들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순간의 만남 속에서 영원을 경험하도록 빛을 발하는 삶을 사신 분들의 도우심이 있었음을 감사합니다. 어두움을 인내로 참아내며 두려움에 싸여 떠는 사람들을 감싸주는 자기 희생의 고난을 마다하지 않으신 분들이 계셨음을 새삼 느낍니다.

저의 짦은 삶이 얼룩짐과 넘어짐과 죄 많은 삶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귀한 분들을 만나도록 하셨습니다. 아낌없는 도움과 격려와 사랑을 받게 하셔서 오늘에 이르도록 도우셨습니다.
아직 생의 종착점에 도달하기 전에, 기억나는 모든 분을을 기록할 수는 없어도 감사, 또 감사함을 글로 남겨야 하겠다는 부담감을 연말에 강하게 느껴서 쓰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저의 삶에 생수처럼 다가오신 분들, 별 빛처럼 영롱한 빛을 남기신 분들 그리고 쉴 그늘이 되어 주셨던 많은 분들을 만나게 해 주셨음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저를 위하여 기도해 주시고, 충고해 주시며 아낌 없는 사랑을 베푸신 모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呼泉(호천) 李興九(이 흥구)
감사, 또 감사! (1)
출생과 어린 시절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편 107편 1절)

출생과 어린 시절

내가 출생한 곳은 경기도 여주군 이포리 밭들이라는 아름다운 마을이다. 
서울에 사시던 어머니가 그 당시로는 매우 늦은 연세(43세) 때 저를 임신하셨고, 출산을 위해 어머님의 고향으로 잠시 내려 가셨다. 일제 말엽이니까 많은 고생을 하시던 어머님이 친정 어머님에게 출산에 따른 도움도 받으시고, 휴식을 취하시기 위함이셨던 것 같다. 

밭들이라는 마을이 아름다운 것을 기억하는 것은 6.25사변 초기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는 나와 바로 위의 형을 외갓집에 맡기시고 어머니와 작은누나 큰 누나, 그리고 형 두 분과 함께 피난길에 오르셨다. 피난길에서 그 당시 중학교 졸업반(현재 고등학교 2학년 정도)에 다니던 작은 형과 큰 형은 군대에 입대하셨다. 전쟁 시에 어머니와 큰 누나가 어디 계신지 알지 못한 채 밭들에 사는 외삼촌 집에 머물다가 함께 경상북도까지 피난을 갔다. 
한 2년 후에 어머님을 만날 수 있었다. 

비록 어린 나이지만. 이른 아침에 용문산 허리를 두른 구름들과, 맑디 맑은 남한강의 물살이 흐르는 곳에서 물놀이를 하던 기억이 새롭다. 엄한 외 삼촌의 집에서 머무는 어린 아이로서 외롭고 힘들기는 했지만 누렇게 익은 곡식의 일렁임이나 눈 온 밭에 파릇파릇 솟아나는 보리의 싹들이며 휘영청 밝은 가을 밤의 달의 아름다움이 기억난다. 지금보다는 공해가 적은 시대이었기에 더욱 자연의 아름다움이 돋보였으리라고 생각한다.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에 있던 집은 전쟁으로 인하여 불탔고, 서울이 수복은 되었어도 거처며 먹을 것을 구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서로 떨어져서 피난길에 오르셨던 어머니도 약 1년간 외갓집에 오셔서 함께 사셨다. 외삼촌에게 신세를 지지 않으시기 위하여 어머니는 우리를 데리고 이삭을 줍기도 하셨고, 품도 파신 것으로 기억된다.

교육을 받아 보신 적이 없으신 어머님이셨지만 이포 국민학교를 찾아가셔서 나와 형과 누나를 학교에 입학시키셨다. 나는 6.25사변이 났을 때 국민학교 1 학년이었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하여 나이가 3학년 연령이 되어서 3학년에 들어갔는데 사실 한글도, 더하기 빼기도 하지 못한 채 학교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냥 가서 따라 하면서 겨우 하나하나씩 배웠다.

어떻든 극빈 학생으로 월사금 등을 면제 받으면서 초등학교 교육을 계속하도록 해 주신 어머님의 열성에 대하여 늘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다. 그리고 어려운 때에 방 하나를 내어 주시고 돌보아 주신 셋째 외삼촌과 아주머니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

내가 어린 시절 자라는 것을 보신 분들은 기억력이 좋은 아이로 기억하신다. 그러나 사실은 다르다. 6.25사변의 참상 가운데 혼이 빠져서인지도 모른다. 온 동네가 불바다가 되고 사람들이 총에 맞아 죽어 있고, 공중에서 떨어지는 비행기의 폭탄이 어디 떨어질지 몰라 두려워했던 일들이 기억난다. 그리고 더운 여름에 폭탄 파편을 맞아도 산다고 해서 솜 이불 밑에 들어가 땀을 흘리던 일들이 뇌리를 스친다. 파편에 피투성이가 된 사람들, 산에 널려 있는 해골들을 많이 보았다. 심한 충격을 받으면 흔히 어린 아이들의 정신 상태에 치명적인 손상을 줄 수도 있는 것 같다. 여러 해 전 북 가주와 남 가주에 큰 지진이 지나간 후 국민학교 학생들을 위한 상담을 한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큰 충격을 안정 시키고 생활과 감정과 두뇌가 본 궤도에 오르도록 돕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6.25 가 나던 해 나는 국민학교 1학년에 입학했다. 키대로 세웠기 때문에 나는 제일 앞이었다. 어디를 갈 때 짝과 손을 잡고 가야 하는데, 여학생인 짝이 나와 잡는 손의 손가락이 6개여서 마지 못해 잡고 가던 생각이 난다. 학교를 들어가기 전에 아버지에 대한 잊을 수 없는 기억 두 가지 가운데 하나는 집에 동냥을 얻고자 걸인이 오셨을 때이다. 마침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내가 있었다. 누가 문 밖에서 동냥을 하기에 어머니에게 말씀 드렸다. 제 말을 아버님이 들으시고 어머니에게 “빨리 밥상을 차려서 그분을 대접합시다.”라고 하셔서 그분과 함께 아버님이 상을 받으시고 마루에 앉으셔서 식사하시던 생각이 난다. 아버님은 경기도 장단군 장단면 노하리에서 나셨다. 10세 이전에 부모님들이 다 세상을 떠나셨기에 일가 집을 전전하시면서 크셨다고 한다. 그러니 설움도 많으셨을 것이고 배고픔이 어떤 것인가를 많이 겪으셨으리라 생각된다. 아마도 그래서 없는 분들에 대한 배려가 남다르지 않으셨으리라.

5,6세 시절 아버지가 시장을 가신다고 하시기에 따라 갔다가, 수박이 먹고 싶어서 사달라고 하니 선뜻 사 주셨다. 아버지가 “무거우니 내가 드마.”라고 하셨지만 떼를 써서 내가 들고 오다가 무거워서 떨어뜨렸다. 깨어진 수박을 그러모으시면서도 아무 말씀하지 않으시고 빙그레 웃으시면서 처다 보시던 모습이 기억난다. 나의 기억으로는 아버지가 큰 소리로 야단을 치셨거나 매를 드셨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참으로 좋은 아버지 상으로 기억되고 있다. 이 자상하시던 아버지는 “빨리 같이 산으로 피신하셔야 한다.”는 간청을 뿌리치시고 계속 불바다가 된 동네를 떠나지 않으셨다. 일생 일구신 집과 재산이 불타는 것을 보시며 서 계시다가 폭격에 오십세 중반에 생명을 잃으셨다. 

(주후 2011년 1월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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