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 이흥구목사에세이 - 이흥구목사이흥구목사http://paulleemoksa.com/rss/get/133​한 번도 못본 국군 전사자 유해http://paulleemoksa.com/bbs/pid/133/detail/id/11848<br><strong>한 번도 못본 국군 전사자 유해 송환식을 보면서 </strong><br />  <br />    2023년7월 26일 하와이 히캄 공군 기지에서 4 대의 F35 전투 제트기의 호위를 받으면서 공중의 주요소라고 일컬어지는 시그너스기가 서울 비앵장에 도착했다. 이륙 이전에 히캄 공항에서는 인도 태평양 해군 사령관을 포함한 많은 군 고위 인사가 엄숙하게그 이전에 유해 인수식 거행였다. 한국을 대표해서는 국방무 차관이 유해 환송을 위해서 참석하였다. 공항을 이륙한 비행기들은 울산 상공을 통과하여 서울 공항에 70년 만에 북한에서6.25 사변에서 전사한 한국 참전 용사 7분의 유해를 고국의 모시고 왔다. 지금도 미국은 계속해서 북한 땅에서 전사한 군인들 가운데 전사하신 분들의 유해를 발굴하기 위하여 힘쓴다고 한다. 그 결과로 발굴된 유해를 정밀한 조사를 통하여 한국 군인임을 확인하고 보낸 것이다. 우리 남한에서도 유해 발국을 계속하고 있다고 한다.<br />    7월26일 밤에 고국의 품으로 돌아온 7 명의 영웅들을 맞기한 기념식이 공항에서 있었다.  대통령, 국방장과 군 요직자들과 미군 장성들이 비행기 앞에 도열하여 전사자의 유해가 밖으로 나오기를 기다렸다. 군인들이 태극기가 덮인 함을 들고 내려오자 대통령을 비롯하여 영웅들에게 거수 경례를 한 대통령을 비롯한 요인들이 거수 경계를 했다. 이어 나팔병의 연주로 묵념의 시간을 가지고 나서21발의 예포가 하늘을 울렸다. 영웅들의 유해든 병사들 가운데 해군 제목을 입으신 나이가 들어 보이는 해군 상사 한 분이 이 눈에 들어띄었다. 그 분은 송환된 7 영웅 가운데서 유전자 감식을 통하여 유일하게 가족을 찾아 73년 만에 유가족의 품에 안긴 최일락 일병(당시 19세)의 조카가 되시는 분이 현재 해군 상사이신데, 하와이로 가셔서 삼촌의 유해를 직접 들고 온 것이다. 고 최일락 일병은 울산에서 출생하셨고, 전쟁이 나자 자원하여 군에 입대하였다. 미 7사단에 배속되어  카투사 소속으로 인천 상륙작전에 참전하셨고, 함경북도 장진호 전투에서 중공군과 교전 중 전사(1950년 12월) 하셨다. 일병님의 형 최상락(21) 하사는 동생이 전사하기네 달 전인 1950년 8월 영덕-포항 전투에서 전했다.  송환되어 도열한 최일락 일병님의 나이가 많이드신 동생이 눈물을 머금고 형님께 드리는 글을 읽은 후에 태극기가 덮인 함 위에 놓았다. 이어서 윤 대통령께서 나와 참전 훈장을 편지 위에 놓았다. 그 후에 영웅들의 함을 든 군인들이 그 분들이 안장 안장 될 현충원으로 향할 버스로 갈 때에 대통령과 군 요직 인사들이 뒤 따라 갔고, 버스가 떠나자 거수 경례를 하였다. 영상 화면에는 “우리는 결고 나라를 지킨 영웅들을 잊지 않는다!” 라는 글자가 선명히 빛났다.<br /> 안타까운 것은 아직 유해를 못 찾은 전사자 수 13만 여명가운데서 1만1.313 전사자의 유해를 찼았다고 한다. 매년 미국과 한국 발굴팀이 찾아내는 숫자는 300-500 분 정도라고 하니 모든 전사자들의 유해를 찾기는 불가능할 것이다.<br /> 하와이 히캄 공항에서 가진 송환식에 참석했던, 아퀼리오 인도태평양 사령관은, 고 최일 식 일병의 유해를 인도 받기 위하여 미국에 와서 참석한 해군 상사이신 조카에게 “평생동안 큰 아버지를 자랑스러워 하라” 고 격려했다고 한다.<br />  <br />                                                                                                     (2023. 8.4)​한 번도 듣지 못했던 한국 전쟁에http://paulleemoksa.com/bbs/pid/133/detail/id/11847<br><strong>한 번도 듣지 못했던 한국 전쟁에 대한 놀라운 소식들 들으며</strong><br />  <br />     7월 23일 서울 영락교회김운성 목사님께서 설교 말씀을 시작하시면서, 대한민국 건국과 기독교의 역할에 대한 강의를 하시는 성결교 신학교 박명수 교수님의 글을 인용 하시면서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 시절에 국무장관을 하신 덜레스 장관이 한국을 1950년 6월에 한국을 방문하셨던 사실과 함께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다.<br />     미국 정치가 덜레스라는 분이 6월 한국을 방문해서 공식 일정을 갖지 전에 영락교회 예배 참석 하셨다. 영락 교회는 해방되던 해 12월 첫째 주일에 현재에 있었던 천리교 신전으로 쓰던 건물에서 공산주의에 넘어간 북한에서 탈북하신 한경직 목사님과 27명이 모여서 ‘베다니 전도교회’라는 이름으로 모였다. 그러나 수 많은 신자들이 북한을 떠나 이남으로 내려 와서 교회로 모여들었다. 미군 부대에서 텐트를 구해다가 예배를 드렸지만 다 수용할 수도 없고 장대같은 장마비가 쏫아져서 도저히 예배를 드릴 수 없게 되자, 피난민 교회가 교회 건축 위원회를 조직하고 맨 땅에서 건축을 시작했다. 잘 알려진 밥 피얼스 박사(세계 선명회 창립자)가 그 소식을 들으리고 그 당시에는 큼으로 큰 금액인 1만 오천불을 건축 기금으로 보내셨다고 한다. 덜레스가 예배를 드린 교회당은 건축이 완공 된 후 약 한 달 후였다고 한다.<br />  덜레스는 아버지는 장로교 목사였다. 그도 독실한 신자였고 장로로 교회를 섬기는 일꾼이셨다. 그 당시 영락교회를 담임하셨던 한경직 목사님이 프린스턴 신학교를  졸업하셨는데, 덜레스는 프린스턴 대학을 졸업하신 분이다. 외교 특사로 한국을 방문하게 된 그는 모든 공식 일정일 이전에 교회 영락교회 주일 예배 시간에 참석하셨다. 그는 피난민 교회에 참석한 성도들의 실상을 보면서, 울부짖어 기도하는 눈물 어린 피난민들의 간구를 본 그의 마음에 큰 감동을 받고 본국으로 1950년 1월 10일에  미 국무장관 에치슨이 미국의 태평안 방어라인에서 한국을 제외한다는  라인을 변경하여야 한다는 급전을 곧바로 미국 트루만 미국 대통령에게 급전을 보내셨다고 한다. 그는  이 나라는 자유 민주주의를 이룩할 수 있는 충분한 기초를 가진 나라임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덜레스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성도들을 목격하고 미국 대통령에게 급전을 보낸, 그후에 이승만 대통령과 장면 외무부 장관등 요직 인사를 만나고 귀국했다. 그런데 그가 떠난지 3일 후인 6월 25 일, 주일 새벽에 무방비 상태에 있는 남한을  북 한은 탱크 242 대를 앞세워 침략하였다.<br />    놀라운 것은 6월 27일  UN안보리회의가 소집되었어 연합군 참전 결정되었다. 그 결과 일본에 주둔해 있언 미 육군 스미스 부대르 비롯하여  7월 1일 미군 1만 6천명 파병이 한국전에 피병 되었다. 미국을 비롯한 16 개국 참전 의료 지원등을 담당한 7개의 나라가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미국이 1차 세계대전을 결심하기에는 3년, 2차 세계 대전의 참전을 결정하기에는 2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했다. 그러나 한국 전쟁에는 사변은 6일만에 파병을 결정하였다. 얼마니 놀라운 세계사적인 결단인가!<br /> 또한 한경직 목사님은 유엔군 사령관이신 맥아더 장군에게 북한 공산당의 잔악함과 기독교 탄압 그리고 반 인륜적인 만행들과 남한 백성들의 고난과 눈물을 친필로 여러 통의 편지를 보내셨다고 한다.<br /> 세계 선명회 총재이신 밥 피얼스 박사님도 1950년 3,4,5월에 남한 전국 교회를 중심으로 하여 전도운동을 하신 후에 귀국하셨다. 그는 한국 전쟁의 소식을 듣고 전 미국을 향하여 남한을 도와야 한다고 힘께 주장해서 여론을 모았다. 피얼스 박사님은 그 후에 군종 목사로 한국에 오셔서 많은 구호사업을 하셨다. 한국 전쟁 후에는 한경직 목사님과 힘을 합하여, 불쌍한 전쟁 고아들과 남편을 잃고 자녀글 키우는 전쟁 미망인들을 도우셨다. 지금 잘 알려진 ‘기독교 세계 선명회’를 전후에 설립하셔서 한국 고아의 아버지가 되셨다.<br />    해방 이후인 1948년 겨울에 빌리 그라함 목사님께서 한국을 방문하여 서울 역에서 한경직 목사님의 통역으로 전도집회를 개최하였다. 1950년 미국 뉴 멕시코 알버커키 에서 복음 전도집회를 하시던 중에 이 비보를 접하신 목사님은 고난받는 한국을 꼭 방문하시고자 결심하셨다. 그러나 전투지에 목사님이 가시는 것을 즉시 허락받지 못하셨지만 1952년 12월 2 일에 하락을 받으셨다. 목사님은 1952년 12월 17에 고국 을 방문하시어 전투에 임한 미군들을 만나 말씀을 증거하고 고생하는 한국 목사님들을 모아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용기를 북돋아 주셨다. 전쟁 고아들을 방문하여 전쟁의 참상을 보시고 미국으로 가셔서 한국을 꼭 도와야 한다고 힘주여 말씀을 하셨으리라.<br />    3년 이상의 피비린내나는 6.25 사변은 1953년 7월 27일 오후 10시에 휴전이 됨으로써 포성이 끊기게 되었다. 결과는 온 산천이 파괴 되었고, 수 백만의 민간인이 사망했고, 실종자들과 부상자들 그리고 이산 가족을 숫자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었을 것이다.  <br />    각종 통계(한국군의 피해 사항은 포함되지 않고 UN 군만 파악한 것임)<br /> 참전국 (21개국 / 전투 16 개국 / 비 전투 5개국)<br /> 파병자 수 (미국1백 60만명, 영국 5만 6천명. 카나다 2만 7천명)  <br /> 그 외의  13국가 표함 참전 UN 용사 총계 1.754,400 <br />  <br /> 사망자 수 (미국 36.492 /영국 1,177/ 카나다 516)<br /> 참전국 총 전사자 (3만 7,902명. 부상자 10만 3460명 /실종 3.950명 / 포로 5.817명)  <br />     한미 방위조약 체결을 위한  제 1차 모임 서울에서 델레스 장관(아이젠하워 대통 령이 덜레스를 국무장관으로 임명함) 제 2차 모임은 1953년 10월 1일 미국 워싱 톤에서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과 이승만 대한 민국 대통령이 참석하에, 한국의 변영태 외무부 장관과 덜레스 미국무 장관이 역사적인 한미 동맹 조약에 서명하였다.<br />    미국 워싱톤 디 씨에 있는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공원 벽에는 한국 전쟁에 참전했던 미군들의 동상과 전쟁에서 숨진 영웅들의 모든 이름을 새긴 기념벽이 둘러서 있다. 그 공원의 기념비에는 “대가 없는 자유는 없다” 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br />  <br />                                                                                           (2023년 8월 3일)<br />  ​대기의 강 (Atmospheric River)http://paulleemoksa.com/bbs/pid/133/detail/id/11846<br><strong>대기의 강</strong><strong> (Atmospheric River)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세상)</strong><br />   <br />    칼리포니아에서 지난 1월 1일부터 13일까지의 강우량이 1년 간의 강우량과 맞먹는다니 놀랍니다. 지난 해 성탄절 몇일 전부터 내린 비가 1월 16일까지 계속 내린다니 약 3 주 반 정도나 되는 긴 기간에 비가 내렸다. 공교롭게도 주일이 성탄절과 1월 1일 그리고 1월 8일 주일 날에는 비가 오지 않았다. 그리고 1월 5일과 12일 두 목요일에도 비가 오지 않았다. <br />    대개 늦은 밤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장대비가 내렸다. 태어나서 처음 ‘대기의 강’ 이라는 단어를 이번 홍수에 알게 되었다. 이것은 태평양에서 증발한 수증기가 강처럼 좁고 긴 띠 모양으로 뭉쳐서 많은 비를 뿌리는 현상이라고 한다. 이 비는 폭우와 함께 폭풍도 몰고 왔다. 도저히 믿어지니 않는 것은 하루에 200미리의 비가 온 곳이 많이 있고, 어떤 곳은 최대 400미리의 비가 온 곳도 있다니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는다. 높은 산은 흰 눈으로 뒤덮여 장관을 이루고 있다, 하루에 몇 피트까지 옷 곳도 있다니 산에 나무가 눈에 묻힌 곳도 있다고 한다.<br />    그 결과 도시 근처의 강 제방이 무너저 근처 도시의 집과 상가들이 침수되어 도로가 오간 곳 없고, 모든 차량이 다 물에 잠기는 상황이 되었다. 어는 사진을 보니 자동차 딜러에 물이 가득차서 자동차 지붕만 보이는 곳도 있었다. 폭으로 인하여 Free Way  부근의 산사태가 나서 칼리포니아의 해변로인 1 번 도로에 70 Km 정도가 마비 되었고, 북가주의 주요 도로일 92번 도로에서는 도로 중간에 큰 구덩이가 뚤려러 교통이 정지되었다. 해변 도시인 몬트레이와 산타 크루즈에서도 해변에 있는 도로나 건물들이 파도에 많은 피해를 입었다.<br />    바람도 거칠게 불어서 폭풍이 되어 시간당 120-200km의 강풍이 물아쳤다고 한다. 폭우와 함께 불어닥친 폭풍에 의하여 많은 조형물들이 쓰러지고 날라갔다. 철로가 유실 되기도 했고, 강에 놓은 철교의 교각이 무녀져 앙상한 레일만 걸쳐져 있는 모습을 영상으로 보았다. 전쟁터에서 폭탄을 맏은 흉한 모습이 널려져 있었다. 내가 사는 노인 아파트의 도로에 접한 곳에 약 200 여년 년륜이 되어 보이는 큰 유카립투스 나무가 20여 그루가 있는데 그 중에 12 그루가 폭우로 인하여 땅이 물러진데다가 세차게 불어오는 폭풍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져서 뿌리를 드러낸 일이 일어났다. 비가 오는데서 나무를 잘라서 처리하는 회사가 급히 와서 나무를 토막내어 잘랐고, 조금이라도 기울어진 나무들을 자르기 시작해서 온전한 나무 8 그루 정도남 남았다.<br /> 오크랜드를 비롯한 여러 도시에서 폭풍과 폭우로 나무가 뿌리째 뽑혀 집으로 쓰러졌다. 이런 저런 이유로 전주가 쓰러저 정은 물론 생명의 위험끼지 주었다. 현재로 이번 재해로 안한 인명 피해는 17 명이라고 한다.<br />    남가주에 유명인들이 사는 산타바바라의 몬테시뇨라는 도시도 홍수를 피하지 못했다. 주 정부에서 여러 곳에 비상 사태를 선포했는데 저명 인사들이 촌을 이룬 그 도시도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대피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어느 마을에서는 근처의 제방이 무너져 온 동네가 물에 잠겼다.<br />    아직 팬데믹이 사라지지 않고 아직도 감염자가 적지 않은 상황엑 맞닥드리게 된 이번 사태로 주민들의 사기가 많이 저하 되었다. 이번 겨울은 예년에 비하여 많은 이상기후로 인하여 힘들게 보내고 있사. 지난 해 감사주일과 성탄절 기간 동안에 동부에서는 폭설로 안하여 많은 피해와 인명의 손실이 있었다. 중부에서는 예기치 못한 토네도로 인하 많은 피해를 받은 주 들이 있다.<br /> 이러한 와중에도 뜻한 인간애의 꽃이 핀 훈훈한 이야기가 매스콤에 올라와서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 주었다. 미국에 조기 유학을 하고 귀국한 한 청년이 결혼을 하고 양가 가족 10여명과 함께 미국으로 신혼 여행을 왔다. 지난 해 12월 21일 눈이 오는 날에 뉴욕을 떠나서 나이아가라 폭포를 구경하기 위하여 길을 떠났다. 가는 도중에 폭설로 인하여 길에서 미끌어져 도로 주변의 눈구덩이로 타고가던 밴이 빠졌다. 도저히 차를 뺄 수 없어서 주위 마을로 달려가서 삽을 구하여 바퀴 주위의 눈을 것어내 보았지만 높이 싸인 차량의 주위의 눈 때문에 차를 움직일 수가 없었다.<br /> 삽을 빌려준 분은 알렉스 팜파냐 부부였다. 그는 부인 안드레아와 의논하여 주위에 모텔이나 숙박 시설이 없는 마을에 온 외국 가정에 대하여 아름다운 사랑을 베풀기로 경정했다. 10여명이난 되는 여행객을 자기 집에서 3일간 쉬며 함께 생활할 수 있도록 집을 열어준 것이다. 이 아름다운 소식이 TV 방송국까지 알려져서 취재 나온 기자에게 마침 일기예보를 보고 마켓에 가서 식료품을 충분하게 구입했기 때문에 손님들을 대접하고 쉴 수 있도록 해 주어서 기쁘다고 환히 웃으면서 말했다. 오갈 데 없는 나그네를 아무 댓가도 없이 받아들여 안전하게 돌보아준 부부의 선한 마음은 재난을 만나서 힘들어하는 소식만 듣던 나에게는 참으로 생수처럼 신선한 소식이었다.<br /> 눈이 멋고 차를 움직일 수 있어서 그 가족은 팜파냐 부부의 집을 떠나 나이아가라 폭포를 향하여 떠날 수 있었다. 그 신혼여행 가족들은 평생 팜파냐 부부의 보살핌에 대한 이야기를 할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생명의 은인과 같은 팜파냐 부부가 대한민국을 방문할 수 있도록 초청하여 고국에서 반갑게 만날 수 있도록 준비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집을 나섰다.<br />  <br />  <br />                                                                                                               (2023.1.20)<br />  <br />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http://paulleemoksa.com/bbs/pid/133/detail/id/11482<br><strong>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strong><br /> <br />    북한이1953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242대의 전차를 앞세우고 공격해 옴으로써 시작된 한국 전쟁은 1957년 7월 27일까지 3년 1개월 2 일동안 삼천리 강산을 피로 물들인 참혹한 전쟁이었다.<br />    나는 사변이 일어났을 때에 서울에서 살았다. 초등학교 1학년이라 세상물정을 알리가 없었지만 어른들의 표정이 참으로 심각한 것을 볼 수 있었다. 사변이 일어나고 한 이틀 뒤에 인민군들이 우리 집에 들이닥쳐서 형들을 찾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 집의 구석 구석을 뒤지고, 심지어는 총에 대검을 꽂아서 인민군으로 쓸 사람이 숨어 있을 만한 곳을 찾아 다니며 이불이나 숨었을 것 같은 곳을 마구 찔르는 것을 보았다.<br />    금년 7월 27일은 휴전 협정을 체결한 지 69주년이 되는 날이다. 미국 시간으로 협정일 하루 전인 7월 26일에 워싱톤 DC 에 있는 한국 전쟁 참전 기념 공원 ‘추모의 벽’에는 미군 3만 6634 명, 한국군 지원부대(카투사)7174 명 등 총 4만 3808 명의 전사자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미국의 정계 요원들과 국방 장관을 비롯한 군 인사들이 개막식에 참석했고, 한국 측에서는 국방장관과 보훈처장이 참석했다. 존 틸럴리 한국 전쟁 참전 용사 기념 재단 이사장의 안내를 받아 새롭게 완공된 ‘추모의 벽’ 앞에 선 인사들이 추모의 벽 앞에서 헌화를 하자, 기념 공원에 있던 2000여 명의 참석자가 일제히 기립했다. 의장대가 연주하는 트롭펫 선율이 울리는 동안 식장에는 엄숙한 침묵이 감돌았다. 참석자들 가운데는 무더운 여름 날씨에도 불구하고 정복을 갖춰 입은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br />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라는 글귀로 유명한 기존의 조형물 부근에 높이 1m 둘레130m의 화강암 추모벽에는 미군 전사자와 카투사 전사자 총 4 만 3808 명의 이름이 새겨졌다.<br />    이 한국 전쟁 참전 기념비 제작에 있어서 잊지 못할 한 분의 평생의 수고가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1951년 1월 엄동 설한에 강원도 원주 323 고지 전투에서 하룻 밤에 적의 수류탄 공격으로 오른 팔을 잃고, 박격포 공격으로 오른 다리를 잃은 장교가 있었다. 그 분의 이름은 <strong>윌리엄 웨버</strong>라는 분이다. 그 분은 본국으로 이송되어 약 1년간의 치료를 받은 후에 불구의 몸으로 계속해서 군복무를 했고 1980년에 대령으로 제대했다.<br />    제대 후에, 그 분은 한국전 참전 용사 기념 공원을 건립하는 일에 혼신을 다하셨고, 계속해서 세상을 떠나실 때까지 ‘추모의 벽’ 건립을 위한 모임을 책임지고 일하셔서 드디어 2016년에 건립을 허락 받게 되었다. 안타깝게도 윌리엄 웨버 대령은 기념비 제막식을 보지 못하고 2021년 4월세상을 떠나셨다. 우리 고국에서도 ‘추모의 벽’ 설립 기금으로 50 억원을 지원 하였다.<br />    통계에 의하면 한국 전쟁으로 인하여 한국군 사망자는 13만 8천 여명, 부상자 45만 여명, 실종자까지 모두 포함하면60만 9천 여명이 된다. 북한군 사망자와 부상자는 합하여 52만 여명, 실종까지 포함하면 80여 만명이라고 한다. 유엔군 사망자는 5만 8천 여명,부상지 48만여명, 실종자까지 포함하면 총 54만 6천 여명이 된다. 남북한 민간인 사망자와 24만 5천명, 학살된 민간인 13만 여명, 부상 23만 명, 납치 8만 5천 여명, 행방불멸 30만 3천여 명으로 모두 100만 여명의 남한 민간인들이 피해를 입었다. 이 숫자 가운데에 6.25사변 초기에 세상을 떠나신 아버지와 전투에서 부상을 당하신 형님도 포함 되어 있을 것이다. 북한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민간인 사망자 28만 2천명, 실종자 79만 6천명 이다. 남북한의 군인과 민간인들이 받은 피해를 합치면 300여 만명이 되리라고 추측한다.<br />  6.25 전쟁은 남북한의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큰 피해를 입었다. 남한의 경우 일반 공업 시설의 40%, 북한은 전력 74%, 연료 공업 89%, 화학공업 70% 가 피해를 입었다.<br /> <br />    윤석열 대통령은 박민식 보훈 처장이 대독한 축사를 통해 “72년 전 수 많은 미국 젊은이들이 공산화의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전쟁의 포화 속으로 뛰어들었다. 이름을 한 분 한 분 새김으로써 우리는 그들을 영원히 기억할 수 있게 됐다” 고 했다. ‘추모의 벽’제막식에 참석한 유족들과 노병들은 “고마워요! 고마워요! ” 라고 하며 새겨진 이름을 만지면서 울었다. 그렇다! 우리 대한민국이 누리는 “자유는 공짜로 얻은 것이 아니다!”<br />           <br />                                                                                                                                                               (2022.8.8)이름 없는 비석http://paulleemoksa.com/bbs/pid/133/detail/id/11418<br>                                             <strong>  </strong>이름 없는 비석<br /> <br />    고국에 닥친 장기간의 가뭄의 종지부를 찍은 날이 제 67회 현충일이었다. 대통령을 위시하여 기념식에 참석한 인사들은 다 흰 비닐 옷을 입고 반갑게 내리는 비를 맞으며 엄숙하게 치루는 것을 동영상으로 보았다.  <br />    내가 월남전에 참전한 후에 제일 먼저 간 곳이 동작동에 있는 국립 현충원이었다. 내가 특별한 애국자이어서가 아니라, 함께 참전했다가 유명을 달리한 전우들의 묘를 찾아 보고 싶어셔였다. 그 때가 벌써 53년이 되었으니 세월이 참으로 빠름을 실감한다.<br />    기념식을 보고 있는데, 한 젊은 여성이 나와서 할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를 읽는 순서가 있었다. 그 여성은 2020년 6월23일에 작고하신 고 황규범 장군의 외손녀 딸이다. 그 분이 읽으시는 편지를 듣는 대통령과 영부인 그리고 모든 참석자들의 모습이 숙연해졌다. 그 분을 통하여 37만 개가 넘는 순국 영령들의 비석 가운데 유일한 이름 없는 비석 ‘소위 김 00의 묘’ 에 대한 의문이 풀렸다.<br />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인하여, 열세인 우리 국군이 물밀듯 내려오는 북한 군을 맞아서 힘겨운 전투를 했다. 낙동강 이남을 보전하기 위하여 피아 간에 생명을 건 치열한 전투가 경상북도 안강 지구 도음산 384 고지에서 있었다. 이 전투에서 우리 장병 가운데 1천 5 백명이 전사했다. 이런 격전지를 지원하기 위하여 1개 소대가 합류하였다. 전투에 직접 참여하고 있는 부대의 소대장은 전쟁일 일어났을 때에 육군 사관학교 1 학년이었다가 소위로 임관한 황규범 소위였다. 지원 파견을 온 소대장과의 만남은 전쟁터에서 서로 이름 세 자의 통성명도 없이 “황 소위 입니다. 김 소위 입니다” 로 끝나고 전투에 임하게 되었다. 전투지에 새로 온 김 소위가 “지형을 살펴보겠다” 하면서 일어나서 나갈 때에 적이 쏜 기관총에 맞아서 전사했다. 그러니까 서로 인사를 나눈지 몇 분도 안 되어서 전사했는데, 그 분의 신분이 김 소위라는 것외에는 그 분의 이름을 알 길이 없었다. 신분을 노출하지 않으려고, 계급장도 이름표도 달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내 추측으로는 6.25 사변이 일어난 직후에는 군인이면 누구나 받는 수 십년이 되어도 썩지 않는 특수한 금속으로 만든 군번표를 받지 못했을 것이라고 본다. 시신을 거두지 못해도 나중에 유해 가운데서 군번표를 찾으면 모든 신분을 알 수 있다.<br />    황 소위는 김 소위의 시신을 큰 소나무 밑에 가매장을 하고, 나중에 다시 돌아오겠다고 마음에 다짐하면서 계속 전투에 임할 수 밖에 없었다. 군 생활을 하던 황 소위가 늘 생각하는 김 소위의 묘를 찾은 것은 그가 전사한 지 14년이 되었을 때였다. 그 곳을 가 보았지만 지형이 바뀌고 숲이 우거지고 기억도 희미해져서 김 소위를 가매장한 곳을 찾기가 매우 힘들었다고 한다. 드디어 시신을 찾아 관계 기관에 사정을 알리니 현충원에서 그 사실을 인정하고 유골을 안장하게 되었는데, 김 소위라는 것 밖에는 아무 정보도 없었다. 그래서 ‘소위 김 00의 묘’ 라는 비석이1960년 5월 24일에 국립 묘지 54 구역에 안장 되었다.  그 김 소위님의 무덤을 황규범 소위는 매년 이런 저런 명절 때마다 걸르지 않으시고 꽃을 들고 찾으셨다고 한다.<br />    황 소위는 김 소위가 묘지에 안장 된 이후 26년간 줄곳 김 소위의 가족을 찾기 위하여 수소문을 했다. 드디어 김 소위가 전사한 지 40년이 되었을때에야 김 소위의 가족을 찾았고 그의 이름이 김수영님인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가슴이 뭉클 하였다. 10분도 안 되는 시간을 만났고, 김 소위라는 이름 만을 아는 한 전우의 죽엄을 잊지 않고 감동적인 역사를 남겨준 황규범 준장님의 아름다운 전우애에 감동을 남겨 주신 것이다.  이 시대에 쉽게 찾을 수 없는 위인의 잊을 수 없는 실화를 손녀딸의 생생한 목소리로 들을 수 있었음에 깊이 감사함을 드린다.<br />    2020년 6월 23일에 작고하신 고 황규범 준장님은 가족들에게 자신이 죽으면 김 소위님의 묘 옆에 묻어줄 것을 부탁하셨다. 넓은 장군 묘역이 아닌 사병 묘역에 묻히시는 것에 대하여 난감해 하는 가족들에게 “오늘 우리가 있는 것은, 우리를 위하여 생명을 바친 김 소위님 같은 분이 계셨기 때문이다” 하시면서 “죽어서도 꼭 만나보고 싶다고 하셨다” 고 하셨다. 영상으로 황 장군님과 김 소위님의 묘비를 보여 주었다. 김 소위님의 이름을 알아냈지만, 아직도 묘비에는 ‘소위 김 00의 묘’ 라고 적혀 있다. 왜 이름을 넣지 않았는지에 대한 사연은 다음과 같다. 그렇게 한 것은 국가 보훈처에서 유족들에게 6.25 사변에 얽힌 처참한 기억들 가운데서도 참으로 고귀한 두 전우의 스토리를 후손들에게 남겨 주고 싶다는 부탁을 가족들이 기쁘게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이름 없는 비석 앞에는 추념비를 따로 만들어서, 김 소위 님의 본명이 ‘김수영’ 님이라고 새겨 놓았다.<br />    많은 분들에게 빚을 지고 산다고 하셨던, 할아버지께 눈물을 글썽이면서 읽은 외손녀의 이름은 전미도라는 분이었다. 그 분은 “힘겹게 지켜낸 이 나라를, 자녀들에게 그리고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기리 전하여 지켜가겠습니다. 할아버지 나중에 반갑게 뵈올께요” 하면서 끝맺었다.<br />                                    ****  ***  ***<br />    현충일이 되면 많이 부르는 비목이라는 가곡이 있다.<br />                 <strong>   <br />                      비목</strong><br /> 초연이 쓸고간 깊은 계곡 양지녘에                                                              <br />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모를 비목이여                                                                           <br /> 먼 고향 초동친구 두고 온 하늘가<br /> 그리워 마디마디 이끼되어 맺혔네.<br />  <br /> 궁노루 산울림 달빛타고 흐르는 밤<br /> 홀로선 적막감에 울어지친 비목이여<br /> 그 옛날 천지스런 추억은 애닯어<br /> 서러움 알알기 돌이 되어 쌓였네.<br />       (한명희 시. 장일남 곡)<br />   <br />    위에 올린 시는 ROTC 2 기 장교로 임관하여 강원도 평화의 땜 북쪽에 위치한 백암산 계곡에서 근무한 한명희 소위가 목격한 무명 용사의 비목을 보고 쓴 시이다. 그가 소대장이 되어 1964년 강원도 백암산의 초소에서 근무할 때에, 순찰을 하던 중에 잡초가 우거진 곳에서 이끼낀 군인이 전사한 것을 기념한 돌 무덤 하나를 발견했다. 그 분의 글을 읽어 보면, 부대에서 어떤 일을 하려고 땅을 파다 보면 유골이 나왔고, 주위에는 구멍 뚤린 철모와 깨진 화이버가 딩굴었다고 한다. 그 돌 더미에 나뭇 가지로 만든 십자가가 썩어 가는 채로 남아 있는 것을 본 한 소위는 그 때의 찢어지는 듯한 심정을 가눌 수 없어서 한 편의 시를 썼다.<br />    한 소위가 제대한  후에 방송국에서PD 로 근무 하면서, 작곡가 장일남 님께, 그 시를 쓴 사연을 설명하고 보여주니, 이내 그 자리에서 작곡한 곡이, 현충일이나 국가 유공자들을 기리는 기념식에서 독창자들이 늘 부르는 불후의 가곡이 된 것이다!<br />    내가 6.25 사변 직후에 다닌 초등학교는 산 고개 하나를 넘어야 하는 곳이었다. 샛길을 걷다 보면, 여기 저기에 유골들이 흩어져 있늘 것을 보면서 다녔떤 때가 기억 난다. 강원도 산골짜기니 격전을 치룬 고지마다 얼마나 많은 전사자들이 전쟁 중이기 때문에 묻히지 못한채 시신이 방치 되었을 것이라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실제로 군번도 받지 못하고 전장에 나가서 전사하신 분들이 얼마나 될까?<br />   <br />    1982년 6월 25일 중앙일보의 기사에 이런 내용이 있다<br />    6·25를 전후해서 열혈청년들은 대한청년단·국민회·태극단 자치회·청방단 등을 스스로 조직, 마을과 고장을 지키거나 전선에 나가 탄약과 주먹밥을 나르며 국군을 도왔다. 이때 희생된 민간인은 줄잡아 85만∼1백만명(내무부 조사). 그러나 지금까지 이들 의병(의병) 들에 대한 국가적 차원에서의 보상은 물론 합동위령제나 위패를 봉안할 장소조차 마련돼 있지 않은 실정이다.<br />    더우기 이들의 활약을 기록한 투쟁사 1권도 준비되지 않아 이들의 호국의지는 해가 갈수록 잊혀져가고 있다. 일부 유족들은 10여년 전부터 경기도 동두천시 생연동43 미황사에 「무명용사 영령봉안소」를 마련, 6천6백10위의 「군번 없는 반공투사」의 위패를 봉안, 현충일과 평양입성기념일(10월18일)에 위령제를 지내고있다.<br /> 한 국방부 역사 기록관은 말하기를 이분들의 전공은 6.25 사변 전쟁 영웅사에 넣어야 할 만한 큰 업적을 남긴 분들이 있다고 했다. 군번이 있든지, 없든지 조국을 위하여 죽음을 감수한 수 많은 분들에 의하여 보존된 자유 대한 민국에서 살고 자라서 이제는 미국에 와 있게 된 것은 ‘생명을 내어준 분들에게 빚을 지고 사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숙연해 진다.<br />    2020년 코로나 19 사태를 미국에서 지낸 나는 그 당시의 기념식을 못 보았다. 찾아 보니 육,해,공, 해병대의 군복을 입은 음악 병사 4 명이 국립 현충사를 배경으로 하여 ‘비목’을 불러 준 것을 동영상으로 보았다. 많은 성악가들이 부른 것도 들었지만, 현충원에서 젊은 네 병사가 부른 ‘비목’이 가장 인상적이었다.<br />    1995년 화천군 동촌리 평화의 댐에 비목공원이 조성되었다. 1996년부터 6월 6일 현충일을 전후하여 비목공원에서 비목문화제를 개최하여 한국전쟁으로 희생된 젊은 영혼들의 넋을 추모하고 다시는 이 땅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기를 염원하는 위령제를 가진다.<br />     그리고 강원도 화천에는 현충일을 전후하여 ‘무명 용사의 날’을 정하고 문화제를 연다고 한다. 누가 쌓아 준 돌무덤도 비목도 없이 아예 성도 이름도 모르는 무명 용사들이 흘린 피가 삼천리 강산에 지금 ‘우리의 피를 잊지 말아주세요!’ 라고 메아리 치고 있을 것이리라.<br />  <br />                                                                      (2022.6.10)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세상의 끝자락에서http://paulleemoksa.com/bbs/pid/133/detail/id/11407<br>                           <strong>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세상의 끝자락에서</strong><br />  <br />    역사를 살펴보면 165-180년에 그 당시의 로마 제국에 ‘안토니우스’ 라는 전염병이 있었다. 이 전염병의 실체는 천연두나 홍역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시리아 지역에서 전쟁을 치르고 돌아온 로마 군인들이 매개가 되어 전파 되어 퍼져 나갔다. 이 전염병이 처음 발병한 이후 15년 동안 로마 전역에 퍼졌고, 로마제국 인구의 4 분의 1 이상의 목숨을 앗아 갔다. 그 때에 로마 황제 아우렐리우스 안토니우스도 전염병에 감염되어 180년 3월 17일에 사망했다.<br />    두 번째 발생한 큰 전염병은 249-251년까지 창궐하면서 로마 시민이 하루에 5.000명의 사망자를 내고 북아프리카의 알렉산드리아에서는 도시 인구 중 3분의 2가 죽은 일명, 키프 리아누스 전염병이 있었다.<br />    1346-1353년까지 유럽에서 4.000만 명, 중국 3.000만 명을 포함해서 전 세계에 1억 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페스트(흑사병)는 역사를 뒤흔든 재앙이었다. 14 세기 중엽 전 세계 인 구를4 억 5.000만 명 정도로 추정할 때 매우 많은 숫자이다. 오늘 날의 세계 인구 비율로 바꾸 면 약 20억 명이 된다.<br />    1918년 유럽에 다시 한 번 끔찍한 전염병 대재앙이 휘몰아쳤다. 스페인 독감 재앙이다. 스페인 독감은 조류 바이러스가 사람에게 감염될 수 있도록 돌연변이 된 것이다. 1918년 최초 발병부터 1920년까지 5억 명이 감염되었고, 사망은 약 1억 명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니까 1차 세계 대전 사망자인 900만 명보다 약 11배 많은 인명의 피해였다.<br />    이번에 우리들이 경험하고 있는 코로나19는 2020년 2월 부터 급격히 퍼지기 시작하여 2021년 여름에 델타로 변이 되었다. 변종 되기 이전에 이미 1억 5.000만명의 감염자와 315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한 미국 연구소의 보고에 의하면 코로나19 발병 이후 인도의 공식 발표인 사망자는 41만 4.482명이지만, 실제로는 10배 정도 더 많았을 것으로 판단 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많은 나라에서 사망한 숫자는 자세히 알수 없지만, 사뭇 많은 사망자가 있었으리라고 보는 이유는 많은 후진국에서의 통계의 정확성이 문제로 남는 것같다. 한 영국의 연구소는 코로나 19 발병 이후 2021년 중반 까지 확진자는 24억 명, 사망자는 1.045만 명이 되리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지금은 오미크론으로 변종되었다가 또 조금 약한 변종이 생겨서 퍼져나가고 있다고 한다.<br />    코로나 19로 팬데믹이으로 인하여 사회적 충격이 대단했다. 사회적 거리두기, 혼란, 실직 으로 인한 빈곤의 문재, 병원 시스템의 혼란으로 인한 코로나 이외의 환자들의 진료의 누적으로 인한 사망의 증가등 수 많은 문제를 나열할 수 없을 것이다. 백신 주사로 인한 부작용으로 인하여 사망한 사람이나 고통 받는 사람도 많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불안과 허무와 고독으로 인한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선교지에 있던 선교사들이 많이 철수 했고, 선교사 지망자도 10분의 1로 줄었다고 한다. 나와 아내 그리고 자녀들과 손자 손녀들, 그리고 교우들과노인 아파트에서 함께 사는 아파트 이웃들도 모두 어려움을 당했고, 당하면서 살아오고 있다.<br />    내가 살고 있는 노인 아파트에서도 한국 주민 1명을 포함하여, 여러 분이 코로나 19로 사망하셨다. 남편도 아내도 마지막 인사도 나누지 못하고, 시신도 병원에서 처리하여 화장을 하고 유족은 유골함을 받아야 했다. 초기에는 유골함을 놓고 고별식도 가족 중에서도 몇 명만 참가하도록 통제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니 코로나 19로 인한 죽음은 준비된 죽음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이해하고 납득할 만한 죽음도 아니다. 사랑하는 아내, 남편, 자녀가 죽어가는 상황에 있어도 가족과 친구들과 완전히 분리되어 아무것도 해 줄수 없었다. 심지어 묘지가 있어서 땅에 묻힐 때에도 가까이에서 지켜보지 못했다. 한 사람의 값진 인생이 코로나 19로 인하여 말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서 애처롭게 떠났다.<br />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기억들이 여러 개가 있다. 코로나 19 사태가 시작되자 일상 생활의 번화 가운데 하나는 식료품을 사는 것이었다. 수퍼 마켙마다 노인들을 위하여 이른 아침에 약 한 시간을 할당하였다. 일찍 나가서 시간 전에 도착해도 이미 많은 사람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시간이 되었다고 해서 일시에 들어가는 것도 아니다. 마켓의 크기에 따라서 일정한 사람을 들여 보내고나서 그들 가운데서 나오는 사람 숫자대로 몇 사람씩 들여보냈다. 그리고 물건을 구입하는 수량도 제한했다. 더운 여름에는 줄을 서서 오랫동안 기다리는 것이 고역이었다. 담아오는 봉투도 전염을 예방하기 위하여 마켓에서 주는 것을 값을 지불하고 가지고 와야 했다.<br />    문제는 이 전염병에 노인들이 감염될 확률이 많고 치사율이 높기 때문에 가능한 한 외출을 삼가라고 했다. 우리 부부의 건강을 걱정한 딸과 사위의 헌신적인 도움을 많이 받아서 식료품과 위생 용품의 조달은 걱정 없이 지나갔다.  내가 사는 노인 아파트에서 약 20분 떨어진 곳에 사는 딸과 사위와 함께 때로는 큰 외손녀까지 잘 도와주었다. 딸과 사위가 지난 해 가을까지 매주 한 번 정도 식료품과 휴지, 마스크, 비닐 장갑 및 손 소독제 및 기타 일용품들을 사서 아파트로 배달을 해 주었다. 아무래도 양식 위주의 생활을 하는 딸네 식구 덕분에 식생활이 많이 서구화 되었다. 큰 외손녀 는 피자, 캐익, 빵, 쿠키, 김치국 등을 끓여서 엄마나 아빠와 같이 와서 우리를 격려해 주었다. 비록 힘든 시기이지만 가족의 따듯한 배려와 사랑이 무엇인지 깊이 경험한 계기도 되었다.<br />       코로나 19가 시작된 직후부터 나의 생활에 이런 저런 변화가 생겼다. 2020년 이월 하순에 집사람의 갑작스런 아픔으로 인하여 간 밤에 응급실에 가서 약 12 시간만에야 진료를 받게 되는 어려움을 시작으로 하여 4 번이나 응급실을 가서 받은 치료 과정을 보면서, 아픈 집사람에 대하여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 무력감은 설명할 수가 없다. 입원을 해도 보호자를 볼 수 없고, 퇴원할 때에도 의사를 만나서 설명을 듣지 못한 채 휠체어에 환자를 실어서 입원해서 치료한 것과 의사의 의견과 처방 약에 관한 설명서 정도의 서류를 들려서 내보냈다. 또한 약해저서 어찌할 줄 모르는 모습에 나 자신도 함께 마음 아파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니 자연히 나의 표정도 많이 바뀐 것을 내가 친히 알게 되었다. 전에는 잘 웃고, 재미 있게 사는 스타일이었느데, 거울을 보니 얼굴에서 웃음이 많이 사라졌다. 일명 포커 훼이스가 된 것이다. 그것은 나만이 아니라 아파트에 사는 많은 노인들도 마찬가지이다. 억지로 웃는 얼굴을 하려고 하지만 어색하기 그지 없는 형상이 되었다.<br /> 그뿐만이 아니다. 집사람이 아파서 힘들어 하니까, 이전에는  TV저녁 종합 뉴스는 늘 빼놓지 않고 시청했는데 2020년 2월 하순부터 현재까지 한 번도 TV를 시청한 적이 없다. 그러니까 미국과 세계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에 대하여 잘 모른다. TV 대신에 집사람의 표정을 살피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 2022년 1월 8일 저녁부터 한 눈이 잘 안보이게 되어 균형을 잃고 넘어질 것에 대한 염려, 이제는 기력을 많이 잃어서 갑자기 피곤하다고 자리에 누운 모습을 보며, 한가하게 발을 쭉 펴고 TV를 시청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안과 의사의 말에는 집사람의 왼쪽 눈을 검사한 결과 그 원인을 알 수 없다고 한다. 스트록이 지나간 흔적이 없다는 것이다. 안과 의사가 백신을 몇 번 맞았느냐고 묻기에 3 번 다 맞았다고 대답했다. 내가 안과 의사에게 왜 백신에 대하여 묻느냐고 하니, 백신 접종 후에 눈에 이상이 있다고 찾아오는 환자들이 여럿이 있었다는 것이다. 코로나 19 예방 백신의 후유증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 보았다.<br />     2021년에는 나 자신도 신체 부위 3 곳에 이상이 생겨서 MRI 촬영을 한 결과 의사가 혹시 암일지도 모른다고 하면서 그 외에 여러가지 검사와 조직검사들을 했다. 이런 저런 약을 먹었다. 게다가 내가 속한 교단에서 20여년 전에 만든 교재의 개정판을 편집하느라고 몇 달 동안 매어달렸다. 문제는 고국에서 인쇄를 하게 되었는데, 초벌 인쇄 한 것을 수정해서 보냈는데, 확인해 보니 약 한 달이 되어도 미국에 묶여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이유는 코로나 때문이라고 한다. 이런 저런 방법을 다 동원하여 약 5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나서야 개정판 인쇄가 끝났다. 그간 스트레스가 극도로 쌓였기 때문인지, 전립선과 방광에 문제가 생겼다. 집사람에 대한 긴장, 병원 예약과 사회적 거리두기 때문에드나드는 일의 어려움 등이 쌓였는지 눈 밑에 심술 굳게 보이는 반달 같은 군살이 불룩 튀어 나왔다.<br />   코로나 19 사태 이후 몇 달이 지나도록 이발을 할 수가 없었다. 전염병이 퍼져나가지 못하도록 사회적 거리와 의무적 마스크 착용 때문에 이발소나 식당이 문을 열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작은 전기 이발기로 머리를 깎아야 하겠다고 시도했다. 집 사람은 건강도 좋지 않고 그 기계로 머리를 깍아본 일이 없기 때문에 망설였다. 하는 수 없이 내가 내 머리를 깍다보니 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쥐가 뜯어먹을 것 같은 머리를 하고 지낼 수 밖에 없었다. 집 사람의 머리도 길어지니 내가 기위로 머리를 다듬어 주는 일이 일상화 되었다. 이 기간 동안에 나의 머리털이3분지 1 정도의 흰 머리가 반 이상으로 늘었다, 정말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세상을 살고 있다.<br />   나는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걷기를 해왔다. 코로나 19 사태 이전에는 노인 아파트 경내를 벗어나서 경치가 좋은 옆 동네 길을 걸었다. 그러나 코로나 초기 부터 지금까지는 아파트 경내의 주위를 주로 걷는다. 그 이유는 집 사람이 건강상의 이유로 햇빛이 있는 오전 10시경에 천천히 혼자 아파트 주위를 걷는 것을 좋아한다. 나도 그 시간에 함께 걷고 싶지만 내가 천천히 걸어도 빠르다고 하면서 부담스러워해서, 나 혼자 이른 아침에 걷는다. 그러나 집사람이 어떤 문제가 생기면 즉시 달려 오려고 멀리 가지 않고 아파트 경내만 돌고 있는 것이다.  걸으면서 발견하는 것은 점점 규칙적으로 걷는 분들이 줄어드는 것을 본다. 신체적으로 연약해 지는 분들도 있으실 것이고, 밖에 나가는 것이 전염에 노출된다고 생각해서 주저하는 분들오 있을 것이다. 이곳 노인들을 보면 평균적으로 체중이 많이 늘었다. 간혹 걷는 분들을 만나면, 현재는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아도 되지만 거의 모든 분들이 마스크를 쓰고 걷는다. 아직까지도 사회적 거리 두기가 익숙해져서 만나면 멀리 사를 벌리고, 어떤 사람은 서로 만남을 주저해서 오던 길로 되돌아 걷는 분도 계시다.<br />    2018년 1월 18일에 내가 사는 아파트를 재 건축하는 일 때문에 10여 개월을 모텔에서 살다가 재 입주 했다. 내가 사는 아파트가 A동이기 때문에 제일 먼저 수리를 해서 입주했고 다른 3 개의 동이 있어서 약 2년여 기간이 걸려서 모든공사가 끝나서 모든 주민이 재 입주하였다. 건물 수리 이전에는 아파트 관리 회사에서 발렌타인 데이나, 독립 기념임, 감사절 그리고 성탄절에는 온 주민이 모여서 파티를 열어 주어서 주민이 서로 사귀어 얼굴을 익혔다. 그 외에 사회 단체에서 와서 안전과 건강 강좌도 열어 주고, 합창잔이나 연주자들이 와서 위문을 해 주기도 했다. 감사절에는 보이스카웃 학생들이 각 아파트마다 다니며 선물을 전달하기도 했다. 또한 2 개월에 한 번 정도는 주민 회의를 통하여 공동 생활에 대한 주의 사항과 안전과 공고 사항을 안내 받기도 했다. 그러니 한 마디로 많이 활동도하고 서로를 알고 사귀며 웃을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그러나 2018년 정초 이후에 아파트 주민을 위한 모임이 없어져서, 30여명이 사는 한국 분들도 점차 거리가 멀어저서 서로가 어색해 하는 안타까움이 있다. <br />    코로나 19 사태 이전에는 주간 중에 하루는 온종일 딸네 집에 가서 지냈고 간간히 들러서 식사도 했다. 온 가족의 생일이나 축하할 일이 있을 때나 부활절, 감사절 그리고 성탄절에는 딸네 집에 모여서 즐겁게 지냈다. 그런데 코로나 19가 나고 집사람의 건강상의 이유 때문에 딸네 집에서 가족이 모여서 함께 즐거움을 나누며 식사하는 시간이 거의 없어졌다. 코로나 백신을 3차로 받은 지난 해 초가을 이후에 간혹 모이기는 했지만, 어린 손녀 딸들이 혹시 감열 되면 안 될 것 같아서, 집 안에 들어가서 식탁에 둘러 앉지 못하고, 뒷뜰에서 식사 할 때만 마스크를 벗고 모였다. 손녀 딸을 만나도 거리를 두고 마스크를 쓰고 손을 흔들어 주는 정도로 밖에 할 수 없으니 사람이 사는 것 같지 않았다. 지난해 12월은 우리 부부가 결혼한 지 만 50년이 된 금혼식이었다. 자녀들과 의논한 후에 때를 정해서 만나기로 하고 그냥 지나쳤다.  <br />       이러한 코로나 19 사태가 있지만, 한 편 마음을 훈훈하게 해 주시는 분들이 있음에 감사하가. 내가 사는 노인 아파트에서 가까운 대학에서는 Second Harvest 라는 단체에서 노인들과 저소득 층을 위한 식료품과 야채가 든 상자를 주 1 회 공급해 주고 있다. 이 단체에서는 베이 에어리아에 사는 주민 45만 여 가구에 매 주 마다 식료품과 채소를 나눈다고 한다. 심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생활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코로나 19 초기에는 내가 속한 교회와 한인 사회 단체에서도 생활용품과 식품을 지원해 주기도 했다. 어느 한인 단체에서는 약 2년간 2주 마다 한 번씩 고기국을 끓여서 한국 사람들이 거주 하는 아파트의 노인들에게 배달해 주는 따뜻한 분들의 수고와 사랑의 대접을 받았다. 이번 사태를 통하여 얼굴을 알지도 못하는 분들의 아낌없는 나눔을 받아 힘을 얻게 된 것에 감사하다.<br />    코로나 19 사태 이후의 물가 상승은 참으로 놀랍다.  물류 대란과 생산량의 저하, 일손 부족, 자원의 부족으로 인하여 물가의 상승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올랐다. 식당의 음식은 약 두 배 정도가 오른 것 같다. 식료품의 가격을 비롯하여 비상 의약품의 값도 정말 많이 올랐다. 가장 두드려진 물가 상승이 직접 피부에 닿는 것은 자동차 개스 값이다. 이 지역의 자동차 개스 값은 약 두 배나 올랐다. 보통유가 6불정도이고 고급유는 7불이 넘는다! 임금은 오르지 않았는데 물가가 급상승하면 빈곤층이 늘어갈 수 밖에 없다. 이 지역에는 코로나 19 이후에 걷잡을 수 없이 많은 사람이 홈레스가 되었다. 도로 신호등 곳곳에 도움을 청하는 종이를 들고 서 있는 사람이 많다.<br />   내가 코로나 19 사태를 겪어오면서 전에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예기치 못한 좋은 결과도 있다. 40여 년간 약 560 편의 찬송 시를 써왔다. 그런데 정말로 놀라운 것은, 코로나 19 사태 이후 2년 4 개월이라는 기간 동안에 250여 편의 찬송 시를 썼음을 발견하였다. 집 사람의 건강 문제와 맞물려서 나의 건강 상 문제가 있었고, 전염병으로 인하여 많은 사회적인 문제, 생활 환경의 급격한 변화와 불안정 그리고 불확실성 때문에 혼란한 기간 동안에 나도 놀랄 만큼의 찬송 시를 쓴 것이다. 힘들고 어려우니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도우심을 청할 수 밖에 없는 환경이 되니 주님께 은혜를 간구하며 매어달린 결과인 것이다.<br />       요즈음은 각종 검사를 받으러 병원을 갈 때에도 온도 측정이 없어졌다. 그간 의사와의 만남은 비 대면으로 했는데, 지금은 대면으로 바뀌었으니 참으로 잘 된 일이다. 비록 코로나 19가 완전히 지나간 것은 아니지만, 질병예방 관계자들이 예상하기로는 2023년 중엽이면 코로나 19가 종식되리라고 한다. 내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세상의 끝자락에서’ 라고 생각하고 글을 쓰게 된 이유는, 이제는 코로나와 함께 살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고 사는 분들이 많은 것 같기 때문이다. 추상같던 정부와 보건 기구에서도 야외에서는 마스크를 쓰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실내에서도 마스크를 쓰지 않아도 되지만, 쓰는 것을 권장한다. 이 한 가지만 하더라도 참으로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학교에서 학생들의 숨통이 트이게 된 것이다. 물론 직장도 마스크에서 자유로와 젔다. 각종 실내 운동 경기를 참관하는 수 많은 사람들도 마스크를 쓰지 않고 침을 튀기면서 고함을 지르며 응원을 한다. 코로나 19의 여파가 아직 있지 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코로나와 함께 살기로 마음 먹은 것 같다.<br />    함께 무릎을 가까이 앉아서 대화도 하고, 기도도 하고 성경 공부를 할 그날을 기대한다. 교 회당에서 마스크를 벗고 마음껏 찬양하는 그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손에 손을 잡고 서로 인 사하고 격려할 수 있는 그날이 오기를 기도한다. 마스크를 벗고 만남으로써, 서로 서로 얼굴을 알아보고 웃어 줄 수 있는 그날을 기다린다. 서로 멀어진 거리가 좁혀지는 그 날이 오기를 간절히 기다린다. 나의 얼굴에 환희와 감격이 되살아 날 그 때가 올것을 믿으며 전진하여야 하겠다. 희어진 머리털이 검어질 수는 없겠지만, 심술 굳은 노인네로서 자리매김을 한 나의 작은 눈 밑에 반달처럼 되어 부어 오른 것도 점차 없어저서 옛 얼굴의 모습이 되었으면 좋겠다.<br />  <br />                                                                                       (2021년 5월 29일 씀)<br />  <br />  <br />  <br />   <br />  <br />  <br />  <br />  <br />  <br />  <br />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OOO.http://paulleemoksa.com/bbs/pid/133/detail/id/11230<br>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OOO.<br /> <br />  <br /> 꼭 25 년 전 12월 중순에 공군 사관학교를 마치고 군에 복무하면서 의학을 공부하던 아들과 동부에서 공부하던 딸이 예고도 없이 남 가주에서 사역하던 우리 부부를 방문했다. 참으로 반갑기 그지없었다.<br /> 방문한 이유는 우리 부부의 결혼 25 주년을 축하해 주기 위함이었다. 바쁜 학업에 쫓길 터인데 시간을 내서 먼 거리까지 와서 축하를 해주는 자녀들 때문에 참으로 행복했던 시간을 가졌다.<br /> 그 때에 우리 부부에게 아들과 딸이 준 선물을 결혼 반지였다. 물론 우리 부부가 결혼 할 때에 금으로 만든 반지를 교환했었다. 그런데 결혼 직후에 우리들이 성경공부를 하는 모임에서 긴급 구호 모금을 하게 되었다. 지금 기억으로는 미국 선교 단체가 운영하는 결핵 요양원 운영이 매우 어렵게 되어 문을 닫을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모임에 참석하는 분들이 이 소식을 듣고는 기도하는 가운데 십시일반으로 힘을 보태보자는 의견을 모았다. 회원들이 자발적으로 모금을 하게 되었는데, 그 때에 우리 부부가 합의해서 우리들의 결혼반지를 빼서 후원금에 보탰다.<br /> 아이들이 자라서 중학교 시절에 “왜 아빠와 엄마는 결혼 혼반지가 없어요?” 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에 반지를 팔아 결핵 환자들을 후원했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제 다 큰 아들과 딸이 그 사실을 기억하고 그 반지를 사서 우리 부부에게 선물해 줄 때의 고마워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결혼 어느새 결혼 50 주년을 넘겼다.<br />  <br /> 대 다수의 기혼자들이 경험하는 일들을 우리 부부도 겪어왔다. 무엇보다도 건강의 문제가 우리 부부에게는 심각했다. 결혼 후 8년 후에 아내가 매일 아파서 힘들어 할 때에, 약국에 가서 진통제만 사다가 먹었다. 추운 12월에 배를 움켜쥐고 뒹구는 아내를 데리고 응급실로 갔지만 돈이 없어서 입원을 못하게 되어 병원 로비에서 죽음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때마침 말씀을 가르쳐 주었던 자매님의 어머님이 의사인 것을 알고 전화를 거니 근무하신 병원에서 응급차를 보내 주셔서 입원을 하게 되었다. 입원하고 치료를 받았으나 내가 신학교를 다니던 때라 치료비를 낼 형편이 못되었다. 그러나 우리들의 사정을 전해 들으신 분이 치료비를 대납해 주셨다. 지금도 그 분에 대한 고마움은 말로 다 할 수 없다.<br /> 그 이후 몇 년 지나서,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 그런데 미국에 와서도 10년마다 집사람의 간 부근에 있는 관에 돌이 생겨서 큰 고통을 겪었다. 바로 지난해 COVID-19 이 시작될 때에 네 번째로 똑 같은 상황이 일어나서 응급실에 갔지만, 환자들이 넘쳐서 대기실에서 11 시간동안 아픔을 참고 견딘 끝에 진료가 시작되어 10 일을 입원하면서 치료를 받았다. 설상가상으로 바로 얼마 후부터 또 다른 응급 상황으로 인하여 2 번이나 더 응급실을 가야했고 여러 가지 검사와 시술을 해야 했다. 어떻게 그 시기를 지났는지 꿈만 같다. 코로나 사태로 인하여 병원 입원과 보호자 출입이 매우 어려운 상황을 어떻게 견디어 냈는지 모르겠다. 오로지 하나님의 크신 은혜에 감사하다.<br /> <br /> <u>나도 남 가주 풀러톤에서 교회를 개척할 때에</u><u>, </u><u>북 가주에서 개척한 젊은 선교회를 함께 돌보기 위하여 오가면서 사역하느라고 무리를 한 결과인지는 몰라도 신장에 문제가 생긴 것을 알지 못하고 감기 약만 사먹으면서 버티다가 큰일을 당했다</u><u>. </u><u>그 당시에 의료 보험이 없어서 의사의 진단을 받기 위하여 갈 수 있는 형편이 못되었다</u><u>. </u><u>그러던 중에 아주 중한 상태에 이르렀을 때에 아는 목사님의 소개로 만난 의사 선생님의 헌신적인 도움을 받았다</u><u>. </u><u>아는 전도사님이 운전을 해 주셔서 도움으로 사무실에 갔더니</u><u>, </u><u>놀라시면서 </u><u>“</u><u>목사님</u><u>! </u><u>응급한 상황입니다</u><u>. </u><u>제가 신장 전문의입니다</u><u>.” </u><u>하시면서 즉석에서 치료를 시작 하셨다</u><u>. 15</u><u>일 정도를 통원 치료를 하라고 하시면서 치료하여 주셨다</u><u>. </u><u>의사 선생님께서는 치료가 된 후에 </u><u>“</u><u>사실</u><u>, </u><u>목회를 접으셔야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u><u>” </u><u>하고 말씀하셨다</u><u>. </u><br />    금년 5월부터 11월까지 담당 의사의 권유로 정밀 검사를 하는 가운데 암으로 추정되는 3 곳이 있어서 <u>이런 저런 여러 가지 검사와 촬영 및 조직 검사를 했다. </u>검사를 위하여 약을 먹어야 하는데 약의 부작용 때문에 잠을 잘 잘 수 없는 나날이 계속되니 참으로 괴로웠다. 그러나 한 가지는 10월 19일에, 다른 한 가지는 11월 5일에 그리고 마지막 한 가지는 11월 12일에 암이 아닌 것으로 판정 났다. 그리고 연약한 신체 부분을 강화해 주기 위한 처방을 받아서 약을 복용하고 있다. 한꺼번에 나타난 건강의 이상 신호를 받고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이런 저런 것들을 정리하기 시작했었다.<br /> 살면서 때로는 경제적인 문제, 사역을 하면서 당면하는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지만 그래도 건강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셨기에 결혼 50 주년을 맞게 된 것이 아닌가.<br />  <br /> 결혼 50 주년이 되니 아들이 49 살이 되었고, 딸이 47 살이 되었다. 자녀들이 중년의 나이지만 머지않아 장년이 되는 나이가 되었다. 아들은 손자가 셋이고 손녀가 하나를 두었다. 그리고 딸은 손녀만 셋이다. 우리가 결혼했던 비슷한 나이에 결혼을 해서 지금 맏손자는 대학교 입학을 준비하고 있다. 우리 부부가 한 번도 못 생각한 귀여운 손자손녀가 일곱이나 된 것에 대한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이다. 그리고 아들 부부와 딸 부부가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고 단란하게 살아감에 더 할 나위 없는 감사를 하나님께 드린다. 아들 삼열가 일곱 살에, 딸 한나는 5 살에 미국으로 왔다. 어느 덧 세월이 흘러서 우리 부부가 결혼 50 주년을 맞게 되었다는 것이 꿈만 같다. 내가 존경하는 어른들이 금혼식을 맞이하실 때에 존경하며 부러워 때가 기억난다. 어느덧 우리 부부가 금혼식을 지나게 되었다니 꿈만 같다.<br /> <br /> 우리 부부가 맞이할 금혼식을 어떻게 의미 있게 가질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한 적이 있다. 아는 분들에게 알리지 말고 조용하게 가족중심으로 지내고, <u>우리들이 자축하는 경비를 쓰지 말고</u><u>,</u> 도움이 필요한 분들을 돕는데 얼마라도 쓰자는 데에 서로 이의가 없었다.<br /> 코로나 사태 이후의 변종인 오미크론 때문에 <u>자녀들의 식구와 함께 모이는 계획까지도 접어야 했다</u><u>.</u> 아들은 오하이오 주에 사는데 일곱 식구가 비행기를 타고 오기가 쉽지 않았다. 딸네도 초등학교에 다니는 손녀가 있어서 어느 식당에 가서 모이는 것도 마음에 내키지가 않았다. 그래서 금혼식 가족 축하 모임은 취소하기로 했다,<br /> 그러나 어떤 것보다도 감사한 것이 있다. 맏 외손녀딸인 나오미와 동생 이바가 우리를 축하해 주기위하여 케익과 피자를 손수 구워서 우리 부부가 사는 아파트로 가져왔다. 약 한 달 전에 운전하기 시작한 나오미가 친히 운전을 하고 와서 전달해 주면서 금혼식을 축하해 주었다. 두 외손녀딸들의 정성이 들어간 음식을 먹으면서 다른 사람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금혼식 식사를 맛있게 먹을 수 있었음에 감사한다.<br /> 결혼 50 주년을 맞이하여 우리 부부에게 건강을 주셨고, 위기와 실망에서 건져 주시고, 주님을 섬기는 사역자로 살아 온 것에 대하여 감사한다. 언제 주님의 부름을 받게 될지는 모르나 그날이 가까워 온다는 것을 직감한다. <u>글의 제목처럼 우리 부부에게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금혼식을 맞았다</u><u>. </u><u>그리고 금혼식을 한 분들에게서는 한 번도 못 본 금혼식을 보냈다</u><u>. </u>주여! 지금까지 동행하시며 인도하신 그 손길을 계속 의지하며 힘차게 살기를 기원합니다.<br />  <br />                                                                                                                                                                  (2021년 12월 31일)<br />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올림픽http://paulleemoksa.com/bbs/pid/133/detail/id/11201<br>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올림픽<br />  <br />  <br /> 말도 많고 탈도 많은 2020 년도 하계 올림픽이 2021년 7월 23일 오후 8시 도쿄 국립 올림픽<br /> 경기장에서 개막식을 가졌다. 그러나 지난 해 초부터 시작된 COVID-19의 영향으로 인하여 1년 뒤인 2021년에야 아직 가라앉지 않은 위험 속에서도 도저히 더 늦출 수가 없어서 개최하게 된 것이다. 개최국인 일본 내에서도 코로나 확진 자 숫자가 크게 증가하는 상황에서 이런 국제적인 대회를 치루는 것에 대한 반대 여론이 강하게 일어났다. 육만 오천 명이 들어갈 수 있는 경기장에서 시작된 개막식에는 각국 수뇌 급 25명과 950명의 인사들이 모인 아주 썰렁한 개막식을 가질 수밖에 없는 환호와 함성이 사라진 적막한 개막식이 되었다.<br />  <br /> 57년 만에 다시 일본에서 올림픽을 개최하게 된 국민들이 기대하던 올림픽이 아니라 무 관중으로 경기가 치룰 수밖에 없으니 올림픽 운영, 외국 관광객들이 없으니 숙박업이나 식당 등의 업종이 울상이 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선수들도 외출이 금지되었으니 동경 시내도 한 번 구경하지 못하게 된 답답한 올림픽이었다.<br />  <br /> 205 개국과 난민 대표 팀까지 합하여 1만 1천 명의 선수가 참가했지만, 입장식에는 각국에서 30 여명만 참석하게 되어 넓은 운동장에 가능한 한 넓은 면적을 차지한 것처럼 대표 팀을 배치했어도 광활한 초원에 덩그러니 모여 있는 양 떼를 연상하는 분위기였다. 올림픽에서 가장 볼만한 것 가운데 하나가 성화가 점화된 후에 시작되는 개막식 공연과, 성화가 활활 타오르는 가운데 폐막식을 하고 성화를 끄게 되는 폐막식 때의 공연이다. 그러나 그런 행사를 총 감독하는 사람이 유대인 비하 발언을 한 것이 문제되어 사임하는 바람에 기대에 못 미쳤다는 평가를 받았다.<br />  <br /> 한국은 개막식에서 선수와 임원을 합하여 354명을 파견했고, 일본의 글자에 따라 103 번째로 입장했다. 배구의 김 연경 선수와 수영의 황선우 선수가 선정되어 태극기를 들고 주 경기장에 입장했다. 폐회식 때에는 어쩐 일인지 순서가 103 번째가 아닌 더 뒤로 밀려서 입장하게 되었다. 게다가 한국 선수들이 입장하는 직전에 카메라를 돌려서 이미 입장한 선수들을 보여주어서 고국에서 폐회식을 시청하는 국민드리 못내 아쉬어 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지만, 주최국인 일본과 개회 이전부터 빚어온 갈등이 원인이 아닐까 하고 추측하는 사람들이 있다.<br />  <br /> 한국 선수들이 묶는 숙소 앞의 유리창에 이순신 장군 프란카드를 설치한 것이 문제가 되어 올림픽 위원회가 거두도록 조치했다. 그런데 그 것 보다도 더 문제가 된 것은 우리 선수들과 임원들의 식사 문제가 주최국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것이 아닌가 한다. 원전 사고가 난 후꾸시마 산 자료로 만든 음식을 먹을 때에 원자에 오염된 것을 먹을 우려가 있다고 하여 한국은 한 건물을 빌려서 원자재를 한국에서 보내주는 것으로 하여 도시락을 만들어서 우리나라 선수들에게 공급하였다. 사실 만 여명 이상이 모이는 식당에 가서 줄을 서고 먹고 나오는 것 보다는 시간과 체력을 관리하는 데 많이 유익했으리라고 생각한다. 이런 일의 발단은 고국에서 동계 올림픽을 개최 할 때에 일본이 보인 태도에 대한 결과라고 본다. 왜냐하면, 그 때에 일본 선수들은 주최국인 한국에서 만든 음식 보다는 가까운 이웃인 나라의 이점을 살려서 자국에서 가지고 온 것으로 음식을 만들어서 일본 선수들을 먹였다. 이번 하계 올림픽에서는 한국이 일본이 한 것을 그대로 갚아준 것이다.<br />  <br /> 205 개국에서 온 11.000 선수들과 임원들을 유치하는 것이 얼마나 큰일인가? 그래서인지, 아니면 일본 특유의 절약 정신에서인지 선수들이 사용한 침대는 골판지로 만든 침대였다. 키가 크고 무계가 많이 나가는 선수들에게는 골판지가 무계를 견디지 못함으로 인하여 불편한 점이 있었던 것 같다. 경기가 끝나고 온 선수들이 밖에 나갈 수 없으므로 자연히 방에 머무는데 TV와 냉장고가 제공되지 않아서 많이 불편하다는 기사를 읽었다. 사용료를 내면 설치해 준 다는 기사도 읽었는데 사실인지는 모르겠다. 많이 화제가 된 것은 화장실과 욕실의 높이가 낮아서 많이 불편해 하는 인증 샷을 올린 선수들의 영상이 유 튜브에 나돌고 했다. 키가 큰 선수들이 천정이 낮아서 똑바로 서지 못하고 머리를 숙인 모습들이었다.<br />  <br /> 역대 하계 올림픽 중에서 가장 많은 돈을 드려서 준비했다는 도쿄 올림픽이지만 COVID-19로 인하여 많은 문제점이 생겼다. 경기 운영 요원 가운데서도 감염자가 생기는 불상사가 생기기도 했다. 심지어는 참가 선수들 가운데서도 감염으로 인하여 시합에 참석하지 못하는 일도 있었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확산을 방지하기 위하여 경기를 운영하는 측에서나 선수들의 동선이<br /> 축소되기 마련일 것이다. 그러다 보니 연습할 장소며 장소로 가는 이동의 문제들이 생겨서 연습량이 부족한 채로 경기에 출전해야 하는 애로사항과 팀 경기에서 경기 시설의 활동과 시간의 규제 등으로 인하여 서로 충분한 연습을 할 수 없게 된 상황이 있었다. 코로나 사태의 상황에서는 선수들을 감염을 막을 만한 환기가 안 된 연습장들이 있었다고 한다. 다른 기이한 현상 가운데 하나는 어떤 시상식에서는 메달을 선수가 받아서 자기가 자신의 목에 거는 일도 생겼다고 한다. 감염을 방지하기 위해서일 것이다.<br />  <br /> 여름철에 몬쓴 기후대에 위치한 일본이 매우 무덥고 비가 내리는 여름을 택하여 올림픽을 개최하였는지는 의문이다. 땀이 많이 나고 습기가 많은 계절에 육상 종목이며 야외 경기에 임하는 선수들이 최적의 상태로 경기에 임하기는 불가능한 것이리라. 육상 가운데서 장거리 경주나 마라톤 같은 경기는 땀을 비가 오듯이 흘리는 경기이다. 올림픽 경기에서 힘든 종목가운에 하나가 철인 3종 경기가 아닐까 한다. 달리기 10 km, 자전거 40 마일 그리고 수영을 1.5 km 나 하는 정말로 힘든 경기이다. 특별히 수영은 도쿄 만에 있는 해상 공원해서 진행했는데, 위치가 동경 시 인근 해안인데다가 날씨가 더워서 수질이 나빠졌는지 수영을 한 선수들이<br /> 나와서 구토를 하는 장면을 보았다. 이 경기에 참가한 선수들에게는 정말로 고욕을 치룬 악몽 같은 경기였을 것 같다.<br /> <br /> 개인종목 경기에서 미국의 수영 선수들의 활약이 돋보였다. 그리고 36세로서 3년 전에 제왕절개로 딸을 낳아 키우면서 5번째 올림픽에 참가한 Allyson Felix 선수의 투혼에 많은 감명을 받았다. 올림픽 대회에서 여러 번 금메달을 획득한 선수로써 마지막 올림픽이 될 경기장의 결승전에 나왔다. 최선을 다해서 달렸지만 동메달에 그쳤다. 선수로서 나이의 한계가 있음을 여실히 볼 수 있었다. 그러나 400m x 4 릴레이 경기에서 미국 팀이 1위를 했는데, 알리슨 선수가 두 번째로 힘차게 뛰었다. 선수로서 마지이 될 올림픽의 말미를 금메달로 장식했다. 사람들은 알리슨의 최선을 다하는 모습과 그의 교양과 겸손한 태도에 대하여도 금메달감이라고 입이마르도록 칭찬을 한다. 알리슨은 올림픽에 출전하여 금메달 7개, 은메달 3개 그리고 동메달 1개로 미국 육상 선수로서 올림픽 최다 메달리스트가 되었다. 지금까지는 미국의 육상선수 칼 루이스가 금메달 9개와 은메달 1개로 최다 올림픽 메달리스트였다.<br />  <br /> 육상 종목에 출전한 Athing Mu(18세) 선수의 활약은 참으로 놀라웠다. 아프리카 수단에서 이민 온 선수이다. 57년간 미국은 800m 육상 경기에서 금메달을 갖지 못했다. 그런데 이 젊은 선수가 해낸 것이다. 그는 400m x 4 경주에도 출전하여 맨 마지막 주자가 되어 1위로 테프를 끊었다. 정말로 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까 57년 전에 도쿄에서 개최했을 때에 미국 선구가 금메달을 획득한 후에, 다시 도쿄 올림픽에서 57년 만에 획득한 것이다.<br />  <br /> 도쿄 하계 올림픽 메달 획득의 국가 순위는 미국이 113개(금 39)의 메달로 1위를 차지하였고,<br /> 2위는 중국이 88개(금 38)의 메달로 2위를 그리고 일본이 58개(금 27)의 메달로 3위를 차지 하였다. 이로서 말 많고 문제 많은 도쿄 올림픽이 끝났다. 다음 올림픽은 2024년에 불란서 파리에서 열릴 예정이다.<br />  <br /> 2022년에 중국에서 열릴 동계 올림픽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번 팬데믹의 영향이 지속된다면 어떻게 될까 하고 걱정을 하고 있다. 또 한 번의 전형 경험해보지 못한 동계 올림픽이 도지 않기를 바란다.<br />  <br />  내가 겪은COVID-19으로 인한 변화http://paulleemoksa.com/bbs/pid/133/detail/id/10992<br>                            내가 겪은COVID-19으로 인한 변화<br />  <br /> COVID-19 사태는 전 세계를 뒤덮은 역사적 대 재앙이라고 불린다. 인도에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로 인하여 사망해서, 사망한 사람들을 쌓아놓은 나무에 올려놓고 화장을 하는 장면이 나오는 충격적인 장면을 보았다. 한 두 명이 아닌 수 십명의 사망자들을 화장하는 것을 보면서 매우 마음이 아팠다.<br /> <br /> 내가 사는 아파트 B동에 사시는 분의 부인은 지난 해 9월에 약 3 주간 몸져 누우셨는데 상태가 점차 악화되어 병원에 가셨는데, 코로나 확진자임이 밝혀져서 급히 입원을 하셨지만 약 1 주 후에 세상을 더나셨다. 이 아파트에 사는 분들 가운데서 여러분이 이 사태로 세상을 떠나신 것으로 보인다. 오늘(5월 8일)코로나 사태의 현황을 보았더니, 세계에서 약 1 억명이 감염되었고 그중에 약 300만 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미국에서만 약3,400만 명이 감염 되었고, 약 60만 명이 사망을 했다. 그러나 존 합킨스 대학교의 추측으로는 세계에서 이번 사태로 사망한 사람은 통계로 나온 300만명의 두 배는 될 것이라고 본다고 한다. 미국의경우도 약 70만명 정도라고 추측한다. 감염자의 수도 통계 보다도 매우 많을 것이라고 한다. 현재 집계하는 통계는 의료 체계가 잘 되어 있는 나라일지라도 정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코로나 19사망자들이  다 병원에서 죽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오차가 있게 마련이고, 저 개발 국가에서는 정확한 통계를 집계 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 기사를 보니 이번 코로나 사태로 세상을 떠난 분들의 나이를 다 더하면 최소 2050만 년이나 된다고 한다. 만일 실제로 그 두 배나 되는 분들이 사망을 했다면 5100 만 년이 되는 것이다. 참으로 놀랍다!<br /> <br /> 인도에서는 5월 7일 하루에 4,100명이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어떤 분이 쓰신 글을 보니,  자신이 코로나 19를 겪으면서 사람들에게 위험한 존재, 전염병을 옮길 가능성이 있는 존재, 다른 사람과 가까이 하지 못할 존재가 되었다고 개탄했다. 이 사태는 개인은 물론 가족과 공동체 그리고 전 사회에 매우 큰 충격을 주었다. 앞으로도 오랜 기간 지속될 것으로 예상되는 것은 외롭게 세상을 떠나 보낸 가족들의 사별의 아픔, 실업,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에 대한 염려와 근심이 현재만의 문제만이 아닐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추측이다. 미래에 만날 슬픔 때문에, 절망의 순간에 겪어야 할  공포심 때문에, 우울증과 고독감 때문에 정신 상담을 위하여 병원을 찾는 분들이 많을 것이라고 한다.<br /> <br /> 코로나 19에 대한 기사들의 읽다가 이 사태가 갖는 인간 생활에끼친 영향이라든가 끼칠 영향에 대하여 요약한 글을 보았다. C.O.V.I.D 라는 영어 글자로 만든 것이다.<br /> Consumer / 소비의 변화.<br /> On going crisis / 경제위기 지속  <br /> Virus out break / 감염병 재출현<br /> International cooperation / 국제적 협력<br /> Depression / 우울증                                                          <br /> 이상에 열거한 것들은 정신 건강, 일상과 사회적 변화, 경제와 소비 문화 등의 변화가 인류가  당면한 문제들임을 열거하고 있다.<br /> <br /> 이런 상황에서 인간은 고립되고, 이기적이 되고, 비 대면적 생활에 익숙해 짐으로 인하여, 더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 불행하고 냉혹해질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고 본다. 서로간에 친절과 사랑을 격려하며, 긍정적인 감정과 공동체와의 연결에 힘을 기울여야 건강한 인생을 살게 될 것이다. 사람은 사회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br /> 나의 경험으로 지난 1년 3 개월은 일생에 새로운 경험을 한 귀중한 기간이었다. 집 사람의 건강의 문제로 인하여 3 번이나 응급실에 가서 가졌던 경험은 오랫동안 악몽처럼 기억될 것이다. 긴 설명이 필요 없을 것 같다. 코로나 사태가 시작된 2월 중순 부터 한참 창궐했던 9월 중순까지 응급실의 상황은 참으로 힘든 곳이었다. 입원도 해야 했고 시술도 해야 하는데 방은 부족하고 의사들은 일을 할 수 없는 상황이라서 예약을 한다든지, 시술을 받기 위하여 병원을 출입하는 일이 참으로 힘들고 신경이 많이 쓰이는 일이었다.<br /> <br /> 그런 가운데서도 딸 아이가 근처에 살아서 많은 도움과 위로가 되었다. 학교에 다니는 세 손녀가 집에서 수업을 받으므로 힘든 가운데서도 어머니의 돌보느라고 병원을 간간히 방문하고 힘든 병원의 스케줄을 조정하는 일을 도와 주었다. 손녀 딸들과 사위가 집사람의 건강을 위하여 기도하고 위로해 주는 카드돠 전화를 주었다. 어려움을 당했을 때에 가족의 위로와 협력과 기도에 많은 격려를 받았다.<br /> <br /> 그뿐만이 아니다. 코로나 19 사태는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하여 병원 출입이 어려운 것 뿐만 아니라 수퍼 마켓이나 필요한 것들을 구입하는데도 많은 애로가 있었다. 집사람은 아파서 집에 누워 있는데, 일용품을 사러 나가면 길게 늘어선 줄을 기다리고 기다려서 구입 수량 제한을 지켜가면서(초기상황) 몇 개를 사가지고 나와야 했다. 은행에가도 줄, 정수된 물을 사러가도 줄, 정말 줄을 서면서 많은 인내를 배웠다. 게다가 75세가 넘은 사람들이 감명되면 치사률이 놉기 때문에 가능한 한 외부 횔동을 자제해야 했다. 전에는 지인들과 만나서 한 달에 약 2회는 외식을 했다. 그러나 지난 1년 3개월 동안에 식당에 간 적이 없다. 주문해서는 외부에 설치한 텐트에서는 먹을 수도 있었으나, 누구를 만나서 식사 할 사람이 없었다. 집 사람을 돌보는 문제도 있지만, 누구에게 나와서 식사하자고 해도 상대편에게 부담을 줄 것으로 생각이 들어 그런 마음을 접었다.<br /> 이번 코로나 19 사태로 인하여 우리 부부의 식생활에 혁신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딸 아이가 우리들이 수퍼 마켓에 가서 오래 기다리는 것, 때로는 필요한 물픔을 살 수 없을 것을 알고는 딸과 사위가 내가 사는 아파트로 우리 부부의 생필품을 공급해 주었다. 자연히 자기 가족이 필요한 것들을 함께 사다가 보니 우리에게 공급하는 것도 양식을 주로한 것들이었다. 브로콜리. 당근. 양파, 쎄러리, 호박 등 야채류를 많이 사다주고, 치즈며, 블로니며 닭고기 등도 많이 사주었다. 집사람의 소화와 건강을 돕기 위하여 키위를 풍부하게 사왔고 계란을 계속 공급하였다. 저항력을 강화시키도록 마늘도 많이 사다주었다. 게다가 세척제, 소독제며 부엌과 화장실 휴지, 그리고 비누와 샴프 그리고 손에 뿌리는 소독제와 좋은 마스크까지 철저하게 지원해 주었다. 하도 미안해서 물품 대금을 지불하겠다고 해도, 우리는 한 가족이기 때문에 이런 때에 서로 힘껏 도와야 한다고 하면서 사양했다. 그렇다! 위기에 가족의 사랑은 더욱 크고 아름답게  꽃피는 것이다.<br /> <br /> 딸의 도움으로 인하여 아침은 계란에 도마도와 양파를 썰어 넣어서 만들어 계란 찜을 만들어 먹고, 곁들여 브로콜리와 당근 그리고 호박을 스팀에 쩌서 먹는다. 점심과 저녁도 거의 양식에 가깝게 먹는다. 이번 사태로 인하여 일생에 처음 경험하는 식생활 습관이 되었다.<br /> 그리고  큰 외손녀 나오미는 가끔 손수 빵을 굽고, 핏자도 굽고, 생일 케익도 만들어서 보내 주었다. 그리고 우리들이 김치찌개를 좋아하는 것을 알고 고등학교 1 학년인 나오미가 김치국을 끓여서 가지고 오기도 했다. 늘 전화로 필요한 것이 있으면 음식이건 식료품이건 알려 달라고 해서, 우리 부부는 큰 외손녀를 가정 총무라고 부른다.<br /> 우리가 당면했던 위기는 삶의 습관, 생활 방식을 바꾸어 놓곤 한다. 이것이 부정적이 아닌 긍정적인 면이라면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다. 이 기간을 통하여 우리는 가족의 유대 관계와 관심이 이전보다 더욱 강화된 것이다. 과정은 힘들었지만 그 과정을 통하여 가족 관계를 강화된 것에 대하어 하나님께 감사한다.<br /> 다행히 코로나19 백신이 조기에 나와서 우리 부부는 2월 24일에 2차 접종까기 마쳤다. 딸과 16살 된 큰 오손녀도 지난 주에 2차 접종을 마쳤다. 사위는 병원에서 일하므로 백신접종 초기에 맞았다. 우리들 뿐만 아니라 이곳 북가주에 약 80%까지 접종을 끝낸 카운티들이 늘어남에 감사를 드린다. 그 결과 매우 엄중했던 거리두기가 점차 완화되고 있어서, 교회 모임도 식당도 점차 제한이 완화 되고 있음에 감사한다. 아마도 7월 초순에는 집단 면역이 형성 되리라고 예측을 한다.<br /> <br /> 글을 마치기 전에 내가 참으로 감사한 일에 대하여 한 가지를 더 나누고자 한다. 이곳 노인 아파트에 인접한 대학에서는 식료품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하여(특히 노인층)상자에 정성들여서 넣은 정결한 식료품, 야채, 계란, 과일 그리고 우유등이 든 것을 공급한다. 누구나 신분증만 보여주면 아주 친절하게 자동차에까지 싫어 준다. 나도 이곳 아파트 주민의 소개를 받아 지난 주에 한 번 방문했다. 내가 놀란 것은, 상자를 자동차에 실어 주는 동안에 한 자매가 따뜻한 커피와 도넛이 든 상자를 내 앞에 가지고 와서 운전석에 앉아 있는 나와 옆에 앉아 있는 집사람에게  커피와 도넛을 집으라고 친절히 말해 주었다. 아직도 다른 사람이 손을 대어서 집어주는 것은 위험함으로 내가 직접잡도록 하는 것이다. 너무나 놀랍고 감사했다. 식료품을 준비해 주어 나누어 주는 것도 감사한데, 맛 있는 커피와 봉투 안에 넣은 양질의 도넛까지 대접한다니…. 따뜻한 커피처럼 마음이 뜨거워졌고, 커피 향 같은 은은한 감사가 마음에 가득찼다. 이런 것이 정말로 마음을 움직이는 사람들이 하는 일의 본보기가 아닐까 한다. 섬기시는 분들은 그들에게 오는 노인들이 도움을 받으러 오는 사람이 아니라, 그들이 섬겨야 할 귀한 대상으로 보는 것이다. 한 잔의 따뜻한 커피와 정성들여 봉투에 넣은 하나의 도넛이 돈으로 친다면 얼마나 뙬까? 아니다. 그것은 돈의 양에 비례되는 것이 아니다. 그 안에 담긴 사랑과 섬김의 봉사 정신의 값은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정신적 가치에서 온 것이다!<br />  <br />                                                                                                        <br />                                                                                                                                                                              (2021.05.09)<br />  <br />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뜻 깊은 생일http://paulleemoksa.com/bbs/pid/133/detail/id/10942<br>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뜻 깊은 생일<br /> <br /> 내 생일은 나는 물론 나를 낳아주신 어머님도 잘 모르신다. 조금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지만, 4남 2녀를 두신 어머님은 구 한말 시대(1902년)에 경기도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나셔서 학교를 다니신 적이 없으시다. 내가 세상에 태어날 당시에는 아이가 태어나도 곧 출생신고를 하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병원이 아닌 집에서 태어난 아기가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세상을 떠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두어 살이 지나서야 출생 신고를 하는 분들도 있었다는 말도 들었다.<br /> <br /> 출생 신고를 하러 가서 생일을 물으면 그 당시에는 매우 익숙한 음력으로 몇 일이라고 하면, 서기가 그것을 양력으로 바꾸지 않고 그냥 적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게다가 나의 형제들 가운에데는 생일이 음력으로 나와 같은 달을 가지고 있는 형제들이 셋이나 있다. 어머님께서 호적을 하러 가셔서 불러주신 생일이 정확하지 않다는 것을 어머니도 인정하신다. 내가 나이가 들어서 어머니에게 자세히 물어서 아마도 그 달 어느 날에 내가 태났을 것이라거 하시는 음력 생일을 당시의 양력으로 찾았다. 내가 현재 나가는 교회나 소속된 단체에 속한 분들이 알고 축하해 주시는 생일은 법적으로 내가 태어난 것으로 기록하는 음력 생일이다. 하지만 나의 가족들이 기억하고 축하해 주는 생일은 양력으로 찾은 다른 날이다.<br /> <br /> 나와 함께 복음 사역을 하고 있는 목사님이 우리 부부가 사는 아파트를 방문하시겠다는 전화를 주셨다. 그러나 COVID-19 사태로 인하여 많은 노인들이 모여 살고 있는 아파트를 방문하는 것을 가능한 함으로 오시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답을 드렸다. 그래도 굳이 오셔야 한다기에 그 이유를 물으니, 전에 아내가 된장을 담은 것을 목사님께 드린  적이 있는데, 그 된장으로 국이나 찌게를 만들어 드실 때마다 드실 때마다 우리 부부를 한 번 대접하기로 생각 했는데, 전화를 주신 그 날에 마지막으로 된장국을 끓이게 되어서, 그것의 일부를 가지고 오시겠다는 것이다. 아무리 말려도 꼭 오시겠다고 하시기에 집에서 멀지 않은 우체국 주차장에서 만나기로 하였다.<br /> <br /> 약속한 시간에 약속한 장소로 가니 벌써 도착해 계셨다. 준비해 주신 된장 우거지국을 주셨다.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받고나서 발길을 돌려 내 자동차로 가려도 돌아서는데, 잠시 기다리라고 하시면서 자동차 트렁크를 여셨다. 그 안에 실려있는 한국산 최상급 배 한 상자와 집에서 담근 김장 김치와 집에서 만든 무 단무지와 압력 밥솥에 찐 맛 있는 계란 20여개를 듬뿍 안겨 주셨다. 그리고 최상급 소고기를 잘 쓸어 담은 큰 접시도 주셨다. 원래 손님 대접하기를 후하게 하시는 분이지만 된장 한 그릇 드리고 받는 것이 너무나 엄청나서 송구스러웠다.<br /> <br /> 내가 아파트로 돌아오니, 마침 저녁 준비를 할 시간이었다.  집사람에게 목사님께서 주신 것들을 전해주니 이내 열어 보면서 매우 놀랐다. 정성드려 준비하신 음식들에 대하여 무엇이라 감사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선물 받은 것으로 맛있게 저녁을 먹으면서 집사람에게 내가 이렇게 말했다. “아마도 목사님께서는  우리 가족이 지키는 나의 양력 생일을 알아내시고는, COVID-19사태로 인하여, 식당에서 생일을 축하해 주실 수 가 없어서 집에서 우리 부부가 단촐하게 생일을 잘 지내라고 보내신 것이 아닌가?” 하며 대화를 나누었다. 푸짐한 음식을 선물로 받은 그 다음 날이 가족이 지켜주는 나의 생일 날이었다.<br /> <br /> 그 다음 날에 감사의 전화를 드리면서 알게 된 것은 내 생일과 관계 없이 베풀어 주신 사랑의 손길임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COVID-19으로 인하여 가까이 사는 딸네 식구와도 함께 식사할 수 없는 우리 부부의 형편을 아시고 생일 전 날에 지금까지 갖지 못했던 방법으로 풍성한 생일 잔치를 갖게 하여 주셨다. 참으로 감사하다!<br /> <br />                                                 ***  ***  ***<br /> 자동차로 약 20여분 떨어진 곳에 사는 딸의 자녀 중에서 15살난 맏 외 손녀 나오미에게서 내 호적에 기록된 생일 날에 다음과 같은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br /> <br /> Hi, Grandpa!                                                                                                      <br /> Happy birthday. I hope you have a great day today.                                                   <br /> This weekend, I will make you yummy cake and bread and soup to celebrate your birthday.  <br /> Thank you for always taking care of me. When I was a baby thank you for taking to me music class. Thank you for walking with me in Hoboken.<br /> <br /> Thank you for always praying for me. I really appreciate everything you do for me.        You and grandma are the best grandparents ever and I am so grateful to have such amazing people in my life.  <br /> I pray for you (and grandmas) health and happiness.                                                <br /> I love you guys so much.            <br />  <br /> 처음 태어난 외손녀를 아끼고 사랑하지 않을 할아버지 할머니가 어디 있을까?<br /> 돌아보면 할아버지로 사랑하고 아낀 것 밖에는 특별하게 한 것이 없다. 그런 나의 태도에 대하여 매우 깊이 감사하는 글에 마음이 뭉클했다.<br /> <br /> 가족이 내 생일로 지키는 날 저녁에 나오미가 직접 만든 맛 있는 생일 케익과 푸짐한 김치찌개와 손수 만들어서 구운 커다란 피자 한 판을 가지고 내 딸과 함께 노인 아파트로 찾아왔다. 가능한 한 외부인의 실내 출입을 금하기 때문에 주차장에서 반갑게 만나 축하 인사를 나누고 푸짐한 음식을 남기고 가기 전에, 또 다른 손녀인 13살인 이반젤린이 캔버스에 정성껐 그린 그림과 9살인 캐리스가 만든 열쇄 고리를 선물받았다. <br /> <br /> 비록 가족이 모여 생일 케익을 자르고 함께 즐거운 식사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그 어느 생일보다도 더 큰 사랑과 격려를 받은 귀한,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뜻 깊은 생일 잔치였다.<br /> 이에 더하여 동역하는 목사님께서 내 생일을 알지 못하셨지만, 푸짐한 음식을 전달해 주신 것은 부족한 사람을 사랑하시는 주님의 섬세하신 손길을 느끼는 귀한 시간이었다. 후로리다 주에 사는 아들네 식구와는 생일 날 저녁 전화 영상으로 생일 축하를 받았다. 나의 일생에 놀라운 은혜를 배푸신 하나님과 부족한 종을 정성을 기울여 대접하신 목사님 그리고 마음씨 고운 사위와 딸 그리고 세 외손녀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br /> 지난 해에는 나를 비롯해서 온 가족이 생일 모임을 갖지 못했다. 집사람의 건강의 문제가 있어서 병원을 오가야 하는 일도 있었지만 COVID-19 사태로 함께 만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금년에도 비록 함께 모일 수는 없었어도 나의 삶에 매우 뜻 깊게 지낸 생일 날로 기억 될 것이다.<br /> <br />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편 118:1)<br /> <br />                                                                                                                                       (2021. 03. 09)​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휄로십 프라자의 겨울 모습http://paulleemoksa.com/bbs/pid/133/detail/id/10899<br>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휄로십 프라자의 겨울 모습<br />  <br /> 지난 해 11월부터 금년 1월 25일까지 단 세 차례 비가 왔다. 예년에 비해서는 도저히 비교할 수 없는 숫자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강수량을 비교할 바가 안 된다. 세 번에 걸쳐서 온 비는 그냥 가랑비 수준으로 두세 시간 내리고 멈추고 말았다. 전에는 비록 가뭄으로 고생한 해에도 몇 차례의 장대비가 내렸다. 왼 일일까? 지난 해 초부터 세차게 닥쳐온 COVID-19 여파로 인하여 집에 머물러야 하는 답답함을 시원한 비라도 내리면 좋으련만, 금년 겨울은 그냥 답답함의 연속이다. 이맘때면, 노인 아파트에 물을 주는 잔디밭이 아니라도 맨 땅에 푸른 풀들이 싹이 나고 자라고 먼 산의 누런 풀들이 파란 색 옷으로 갈아입는 때이다.<br />  <br /> 금년 1월 17일 오후 5시 기온은 73도 이였다. 1월 하순에 초여름의 날씨로 살고 있다니 정말로 이상 기온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일기 예보에는 1월 26일부터 비가 올 것이라고 하는데 얼마나 올지는 두고 볼 일이다.<br />  <br /> 우리 부부가 휄로십 프라자에 입주한지가 8년이 조금 지났다. 세월이 실로 광음처럼 빨리 지나갔다. 내가 사는 유닛은 A 동 202호실이다. 주차장으로 가는 분들이나 아파트 단지를 걷는 분들, 또는 단지 밖으로 걸러 나가는 모든 분들이 눈 안에 들어온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이 아파트 단지에서 가장 좋은 유닛에 산다고 말하기도 한다.<br />  <br /> 산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아파트는 많은 나무들이 있고, 주위 동네도 널찍하고 나무를 많이 심은 저택들이 늘어서 있다. 노인 아파트에 입주한 여러분들이 좋은 환경을 만끽하며 매일 걷는 분들이 많다. 그 중에 매우 특징이 있는 분들에 대하여 적고자 한다. 이 글을 쓰면서도 안타까운 것은 이 글에 나오는 분들이 대부분은 그 모습을 지금은 볼 수 없든지 아니면 아주 가끔 볼 수 있지만 매우 연약해진 모습이다.<br />  <br /> 우리 부부가 독수리 할머니라고 부르는 분이 있다. 이분은 미국 할머니인데 약 80여세 되신 분이다. 매일 낮 12시 경에 뙤약볕을 받으시며, 아파트 밖으로 나가서 약 1시간 정도 속보로 걸으시는 분이시다. 매부리코에 흰 머리를 날리시며 상의는 소매가 파진 흰 셔츠를 입고 힘차게 걸어가시는 모습이 독수리를 연상하게 한다. 우리 생각에 이 할머니는 100세 시대를 사시는 분 같았다. 그런데 지난해 8월경부터 독수리 할머니를 뵐 수가 없었다. 할머님이 타시는 차는 빨간색 현대 액센트 인데 그분의 주차장에는 늘 주차 되어 있었다. 그 후 어느 날 오후 도우미의 도움을 받아 보행기를 미시면서 한발 한발 내딛으시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한두 주 이후에는 그렇게 걸으시는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br />  <br /> 우리 부부가 반바지 아저씨라고 부르는 중국 할아버지가 계셨다. 우리들이 이렇게 부르는 것은 그 분들의 이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할아버지는 우리 부부가 입주할 때에 굽은 허리에 반바지를 입으시고 주로 자전거를 타시는 것으로 운동을 하셨다. 나중에는 힘들고 위험하기 때문인지, 걷기로 운동을 하시었다. 허리가 많이 굽으시고, 발도 많이 휘어서 걸으시는 모습이 어색하셨다. 한 네 달 전에 보행기에 의지하여 억지로, 억지로 발걸음을 떼시면서 걸으시는 모습을 보았다. 그 후에는 모습이 보이지 않고 그분이 사시는 아파트에 불이 꺼져있을 때가 많아서 매우 염려가 되었다. 나중에 들리는 소식은 그 즈음에 세상을 떠나셨다는 것이다. 요사이는 그 부인 되는 분이 아주 외로운 모습으로 혼자 수심에 차서 동네 주위를 걷는다.<br />  <br /> 겨우 지팡이에 의지해서 걸으시는 80대 중반 되는 중국 할머니가 있다. 우리 부부는 아침 7시 30분경에 걷고, 오후에는 4시 반 경에 또 한 번 걷는다. 이 노인 단지에는 여러 종류의 주거 시설들이 있다. 양로병원, 노인들이 세 들어 살고 있는 시설 좋은 아파트, 혼자 생활할 수 없어서 식사와 의료를 제공하는 값비싼 요양원 그리고 연립 주택에서 사시는 분들이 있다. 건물마다 집마다 예쁜 꽃들이 사시사철 만발한다. 오후에 걸을 때에 한 중국 할머니를 만날 때면, 아파트 단지를 도시면서 꺾은 예쁘고 탐스런 꽃 한 송이를 꼭 들고 행복한 모습으로 걸어오신다. 남의 정원이나 건물 주위에 있는 꽃을 꺾으면 안 되는 것을 모르시는 것 같다. 그래서 어느 날 집사람이 그 할머니에게 “꽃을 꺾으시면 안돼요.” 라고 말했지만, 할머니가 잘 못 알아들으시는 것 같았다. 이 할머니도 한 여섯 달 정도 못 만나고 있다. 코로나 사태로 인하여 방에만 계시기 때문인지, 아니면 편찮으신지 모르겠다.<br />  <br /> 우리 부부가 공주와 머슴이라고 부르는 부부가 있다. 중국분이신데 우리 부부 나이 정도가 되는 것 같다. 부부가 매우 조용한 성격이라서 중국 사람과 만나도 별로 대화를 하지 않는다. 아침과 저녁에 두 분이 걸으시는데, 특징은 부인이 몸을 곧게 세우시고 앞장서서 걸으면, 남편은 훤칠한 키에 허리를 조금 수그리고 땅을 보면서 더운 여름에도 엷은 자켓을 한 손에 들고 두세 발자국 정도 뒤를 따라서 걷는다. 그래서 공주님의 뒤를 따르는 머슴 같은 느낌이 드는 분들이다. 몇 달 전부터는 남편 되시는 분이 건강상의 이유에서인지 걷지 않더니 요즈음 지팡이를 짚고서 혼자서 천천히 걷는다. 부인 또한 한참 동안 안 보이다가 혼자서 천천히 걷는다. 참으로 외로워 보인다.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 이후에 방에 오래 있게 되고 서로의 사귐이 단절된 상태가 장기화 되면서 노인 아파트 입주자의 정신적 육체적 건강이 많이 나빠지는 것이 눈에 뜨인다.<br />  <br /> 늘 손을 상의 호주머니에 넣고 땅을 보면서 천천히 걷는 중국 아저씨가 있다. 잘 웃지를 않으신다. 또한 중국 분들과 만나도 거의 말을 하지 않는다. 늘 사색하는 듯한 표정을 짖고 살기에 철학자라고 부른다. 이분의 부인은 자그마한 키에 날렵한 체형을 가진 분이다. 두 분이 함께 걷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부인 되는 분은 걸음걸이가 빠르고 혼자서 멀리 다닌다. 앞으로만 걷는 것이 아니라 뒤로도 걷고 때로는 발을 왼발과 오른 발을 옆으로 교차해서 걷기도하는 부지런한 분이다. 그러나 약 3개월 전부터 철학자의 부인을 볼 수가 없다. 그 이유는 잘 모르겠다. 건강이 좋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자녀 집에 가서 머무는지도 모른다. 요즈음은 철학자 아저씨께서 가끔 짧은 시간 혼자 천천히 외롭게 수심에 찬 모습으로 힘겹게 걷는다.<br />  <br /> 러시아 사람으로서 80대 중반으로 보이는 삼총사 할아버지들이 있다. 우리가 이 아파트에 이사 온 8년 전, 이른 아침이면 세 분이 서로 아파트 밖으로 나가서 약 한 시간을 걷고 들어 왔다. 한 삼년 간 지속되다가 세 분 가운데 한 분이 건강이 좋지 않아 빠지게 되었다. 이분은 지금도 아파트 밖을 거의 나오지 않고 사신다. 그래서 삼총사 할아버지들의 결속은 와해되어 다른 두 분은 따로 따로 아침마다 꾸준히 걸으셨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 몸이 야윈 한 분은 약 2 개월 전부터 보이지 않아서 걱정이 되었다. 그 후 얼마간은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걷다가 요즈음은 볼 수 가 없다. 세 분 가운데서 가장 크고 몸집이 좋은 할아버지는 아파트 밖으로 나가서 걷는 것을 중지하고 아파트 단지 안에서 천천히 한 바퀴 정도를 걷고는 들어가신다. 세 분의 건강 상태가 코로나 사태 이후에 많이 나빠졌음이 눈에 확연하게 띈다.<br />  <br /> 우리 부부가 사는 A 동 202호실 바로 앞에 있는 201호에는 80대 후반의 이란 할아버지가 홀로 살고 있다. 시간이 무료해서인지 가끔 작은 개를 데리고 와서 지내곤 한다. 이 할아버지는 약 한 시간 이상을 이 아파트 단지를 돌고 또 도신다. 몸집이 매우 좋고 건강하신 분이다. 그런데 그렇게 잘 걷던 분이 코로나 사태 이후에는 한 6개월 정도는 두문불출 하셨다. 그러다가 갑자기 이 할아버지가 나와서 걷기를 시작하였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렇지 않아도 배가 많이 나온 분이셨는데, 걷는 것을 아예 중단하고 방에만 오래 계시다가 체중이 많이 늘었음이 확실히 눈에 띄었다. 그래서 우리 부부가 동시에 말하기를 임신 10개월을 넘어서 11개월이 된 분 같다고 하면서 심히 놀랐다. 그러나 한 3주 정도 열심히 운동의 하시더니 다시 두문불출하고 계신다. 가끔 큰 기침 소리가 들려서 건강이 좋지 않으신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br />  <br /> 아주 부지런한 80대 후반의 중국 할아버지가 같은 건물 3층에 사신다.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 이전에는 아침이면 가방을 메고서 체육관을 다니시며 부지런히 건강을 관리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나 코로나 사태로 인하여 체육 시설이 문을 닫게 된 이후에는 이른 새벽이면 혼자서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서 약 한 시간을 속보로 다녀오셨다. 얼마나 빨리 걸으시려고 노력하시는지 상체가 앞으로 많이 나오게 되니 자연히 엉덩이는 뒤로 하여 달리듯이 걸으신다. 공기를 가르는 자세로 땀 흘리며 걷는 모습이 존경스럽다. 이 할아버지의 이름을 모르기 때문에 우리 부부는 ‘급히 화장실 가는 할아버지’라고 부르곤 한다. 그런데 이 할아버지도 약 3개월 전부터 볼 수 가 없다. 건강이 좋지 않으시던지, 아니면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행 하느라고 아파트에서 나오지 않기 때문인지는 모르겠다.<br />  <br /> 이상에 기록한 분들 이외에도 다른 여러분이 계신다. 실로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는 노인 아파트에 사시는 분들에게 매우 치명적인 타격을 주고 있음을 본다. 감염의 두려움으로 인한 격리, 그로 인한 운동 부족과 영양상태의 빈약함 또한 오랫동안 이웃과도 소통하지 못한 채 약 1년을 살아오면서 갖는 고독감 등 여러 요인들이 노쇠 현상을 더 앞당기고 있음을 본다. 지금까지 강우량이 아주 작은 이 겨울 날씨로 인한 환경과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로 인하여 이곳 노인 아파트에 사시는 분들의 건강 상태는 지난 8년간 경험하지 못한 매우 서글픈 모습이다. 이 긴 어두움의 터널을 지나가면서, 언젠가 다가올 광명한 출구가 있음을 믿고 인내하며 살아가야 하리라.<br />  <br /> (2021. 01.25)<br />  <br />  Name Labelhttp://paulleemoksa.com/bbs/pid/133/detail/id/10878<br>Name Label<br />  <br />    비교적 편지나 카드를 자주 쓰는 나로서는 내가 사는 아파트의 주소를 쓰는 것만 해결되어도 시간이 절약된다. 여러 통의 편지에 수신자의 주소를 쓰는 것도 신경이 쓰이는데, 작은 글씨로 내 주소를 반복해서 쓰지 않기 위해서 전에는 스티커로 된 저렴한 네임 레이블을 주문해서 썼다.<br />    아들이 이락 전투에 파병 되었을 때라고 기억한다. 어떻게 알았는지 아니면 우연히 연결 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 즈음에 DAV 라는 미국 상이군경 단체에서 후원을 요청하는 인쇄물과 함께, 친절하게도 내 이름과 그 당시 내가 살던 곳의 주소로 인쇄 된 네임 레이블이 동봉되어 왔다. 외국에 파병된 아들을 둔 아버지로서 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서 그 때부터 얼마 전까지 정기적으로 후원을 했다. 아들에 대한 마음 때문만이 아니라, 나도 젊은 시절에 한국군으로 월남전에 파병되었던 경험이 있어서 적은 금액이라도 상이용사들을 돕는 것은 마땅하다고 생각했다.<br />    그런데 DAV를 후원한지 약 2년 후부터 다른 여러 전상자들을 돕는 단체들에서 우편물이 오기 시작했다. 이런 저런 물건과 함께 보내는 편지에는 거의 예외 없이 네임 레이블이 약방의 감초처럼 꼭 같이 왔다. 그 후에는 미국의 이곳 저 곳에 있는 여러 원주민 학교들에서도 오고, 병원에서도 오고, 지역 사회에 있는 여러 구호단체며, 빈곤한 사람들에게 식품을 공급하는 Second Harvest, 구세군, HABITAT, KQED 공영 방송국, 미국 성서 공회에서 군인들에게 성경 보내기 운동 홍보, 미국 치매 협회, 미국 심장 협회 등 약 30 여 군데서 쉴 사이 없이 오는 홍보물들을 하루에도 몇 통을 받는 날이 많다.<br />    이런 단체에서 보낸 네임 레이블은 이제 너무나 많아서 여러 큰 봉투에 가득가득 모아두고 있다. 나의 남은 날들이 얼마일지는 몰라도 같은 주소에서만 산다면 수 십 년을 쓰고도 남을 것 같다. 그 외에 작은 메모지, 달력 또는 수건, 양말, 볼펜 등등의 선물도 함께 오기도 한다. 이런 물건을 받으면 마음이 약해져서 적은 액수라도 후원금을 보내왔다. 그러나 머지 않아서 포화상태에 이르렀다. 그래서 지난 해에는 한 달에 한 곳을 정해서 후원을 해 보기도 하였다. 그러다 보니 못 보내는 다른 단체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많이 들었다. 그렇다고 모든 단체들을 다 도울 수 있는 형편이 되지 않는 나로서는 돕는 단체들을 정리하여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br />    금년부터는 내가 사는 도시의 구호 단체인 City Team, 구세군, 내가 속한교단의 구호사업, Compassion, Second Harvest 같이 재정 사용이 투명하고 또 확인할 수 있는 단체와 연결하여 적은 금액이라도 계속 후원하고자 한다. 공교롭게도 이상에 열거한 단체는 네임 레이블이나 선물을 보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얼마나 정확한 보고인지는 모르겠으나 가끔 재정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에 대한 도표들도 보낸다. 내가 잘 결정한 것인지는 나 자신도 모르겠다. 내게 오는 모든 단체들을 다 도울만한 여유가 있지도 않고, 내가 보낸 후원금이 어떻게 쓰이는지도 모른 체, 네임 레이블이나 다른 선물들이 온다고 해서 미안한 마음에 할 수 없이 한다는 것도 좋은 것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지내다 보면, 언젠가는 내게 계속해서 후원금을 요청하는 단체도 점차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된다.<br />  <br />  <br /> (2021.0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