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 이흥구목사에세이 - 이흥구목사이흥구목사http://paulleemoksa.com/rss/get/133내가 겪은COVID-19으로 인한 변화http://paulleemoksa.com/bbs/pid/133/detail/id/10992<br>                            내가 겪은COVID-19으로 인한 변화<br />  <br /> COVID-19 사태는 전 세계를 뒤덮은 역사적 대 재앙이라고 불린다. 인도에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로 인하여 사망해서, 사망한 사람들을 쌓아놓은 나무에 올려놓고 화장을 하는 장면이 나오는 충격적인 장면을 보았다. 한 두 명이 아닌 수 십명의 사망자들을 화장하는 것을 보면서 매우 마음이 아팠다.<br /> <br /> 내가 사는 아파트 B동에 사시는 분의 부인은 지난 해 9월에 약 3 주간 몸져 누우셨는데 상태가 점차 악화되어 병원에 가셨는데, 코로나 확진자임이 밝혀져서 급히 입원을 하셨지만 약 1 주 후에 세상을 더나셨다. 이 아파트에 사는 분들 가운데서 여러분이 이 사태로 세상을 떠나신 것으로 보인다. 오늘(5월 8일)코로나 사태의 현황을 보았더니, 세계에서 약 1 억명이 감염되었고 그중에 약 300만 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미국에서만 약3,400만 명이 감염 되었고, 약 60만 명이 사망을 했다. 그러나 존 합킨스 대학교의 추측으로는 세계에서 이번 사태로 사망한 사람은 통계로 나온 300만명의 두 배는 될 것이라고 본다고 한다. 미국의경우도 약 70만명 정도라고 추측한다. 감염자의 수도 통계 보다도 매우 많을 것이라고 한다. 현재 집계하는 통계는 의료 체계가 잘 되어 있는 나라일지라도 정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코로나 19사망자들이  다 병원에서 죽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오차가 있게 마련이고, 저 개발 국가에서는 정확한 통계를 집계 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 기사를 보니 이번 코로나 사태로 세상을 떠난 분들의 나이를 다 더하면 최소 2050만 년이나 된다고 한다. 만일 실제로 그 두 배나 되는 분들이 사망을 했다면 5100 만 년이 되는 것이다. 참으로 놀랍다!<br /> <br /> 인도에서는 5월 7일 하루에 4,100명이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어떤 분이 쓰신 글을 보니,  자신이 코로나 19를 겪으면서 사람들에게 위험한 존재, 전염병을 옮길 가능성이 있는 존재, 다른 사람과 가까이 하지 못할 존재가 되었다고 개탄했다. 이 사태는 개인은 물론 가족과 공동체 그리고 전 사회에 매우 큰 충격을 주었다. 앞으로도 오랜 기간 지속될 것으로 예상되는 것은 외롭게 세상을 떠나 보낸 가족들의 사별의 아픔, 실업,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에 대한 염려와 근심이 현재만의 문제만이 아닐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추측이다. 미래에 만날 슬픔 때문에, 절망의 순간에 겪어야 할  공포심 때문에, 우울증과 고독감 때문에 정신 상담을 위하여 병원을 찾는 분들이 많을 것이라고 한다.<br /> <br /> 코로나 19에 대한 기사들의 읽다가 이 사태가 갖는 인간 생활에끼친 영향이라든가 끼칠 영향에 대하여 요약한 글을 보았다. C.O.V.I.D 라는 영어 글자로 만든 것이다.<br /> Consumer / 소비의 변화.<br /> On going crisis / 경제위기 지속  <br /> Virus out break / 감염병 재출현<br /> International cooperation / 국제적 협력<br /> Depression / 우울증                                                          <br /> 이상에 열거한 것들은 정신 건강, 일상과 사회적 변화, 경제와 소비 문화 등의 변화가 인류가  당면한 문제들임을 열거하고 있다.<br /> <br /> 이런 상황에서 인간은 고립되고, 이기적이 되고, 비 대면적 생활에 익숙해 짐으로 인하여, 더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 불행하고 냉혹해질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고 본다. 서로간에 친절과 사랑을 격려하며, 긍정적인 감정과 공동체와의 연결에 힘을 기울여야 건강한 인생을 살게 될 것이다. 사람은 사회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br /> 나의 경험으로 지난 1년 3 개월은 일생에 새로운 경험을 한 귀중한 기간이었다. 집 사람의 건강의 문제로 인하여 3 번이나 응급실에 가서 가졌던 경험은 오랫동안 악몽처럼 기억될 것이다. 긴 설명이 필요 없을 것 같다. 코로나 사태가 시작된 2월 중순 부터 한참 창궐했던 9월 중순까지 응급실의 상황은 참으로 힘든 곳이었다. 입원도 해야 했고 시술도 해야 하는데 방은 부족하고 의사들은 일을 할 수 없는 상황이라서 예약을 한다든지, 시술을 받기 위하여 병원을 출입하는 일이 참으로 힘들고 신경이 많이 쓰이는 일이었다.<br /> <br /> 그런 가운데서도 딸 아이가 근처에 살아서 많은 도움과 위로가 되었다. 학교에 다니는 세 손녀가 집에서 수업을 받으므로 힘든 가운데서도 어머니의 돌보느라고 병원을 간간히 방문하고 힘든 병원의 스케줄을 조정하는 일을 도와 주었다. 손녀 딸들과 사위가 집사람의 건강을 위하여 기도하고 위로해 주는 카드돠 전화를 주었다. 어려움을 당했을 때에 가족의 위로와 협력과 기도에 많은 격려를 받았다.<br /> <br /> 그뿐만이 아니다. 코로나 19 사태는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하여 병원 출입이 어려운 것 뿐만 아니라 수퍼 마켓이나 필요한 것들을 구입하는데도 많은 애로가 있었다. 집사람은 아파서 집에 누워 있는데, 일용품을 사러 나가면 길게 늘어선 줄을 기다리고 기다려서 구입 수량 제한을 지켜가면서(초기상황) 몇 개를 사가지고 나와야 했다. 은행에가도 줄, 정수된 물을 사러가도 줄, 정말 줄을 서면서 많은 인내를 배웠다. 게다가 75세가 넘은 사람들이 감명되면 치사률이 놉기 때문에 가능한 한 외부 횔동을 자제해야 했다. 전에는 지인들과 만나서 한 달에 약 2회는 외식을 했다. 그러나 지난 1년 3개월 동안에 식당에 간 적이 없다. 주문해서는 외부에 설치한 텐트에서는 먹을 수도 있었으나, 누구를 만나서 식사 할 사람이 없었다. 집 사람을 돌보는 문제도 있지만, 누구에게 나와서 식사하자고 해도 상대편에게 부담을 줄 것으로 생각이 들어 그런 마음을 접었다.<br /> 이번 코로나 19 사태로 인하여 우리 부부의 식생활에 혁신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딸 아이가 우리들이 수퍼 마켓에 가서 오래 기다리는 것, 때로는 필요한 물픔을 살 수 없을 것을 알고는 딸과 사위가 내가 사는 아파트로 우리 부부의 생필품을 공급해 주었다. 자연히 자기 가족이 필요한 것들을 함께 사다가 보니 우리에게 공급하는 것도 양식을 주로한 것들이었다. 브로콜리. 당근. 양파, 쎄러리, 호박 등 야채류를 많이 사다주고, 치즈며, 블로니며 닭고기 등도 많이 사주었다. 집사람의 소화와 건강을 돕기 위하여 키위를 풍부하게 사왔고 계란을 계속 공급하였다. 저항력을 강화시키도록 마늘도 많이 사다주었다. 게다가 세척제, 소독제며 부엌과 화장실 휴지, 그리고 비누와 샴프 그리고 손에 뿌리는 소독제와 좋은 마스크까지 철저하게 지원해 주었다. 하도 미안해서 물품 대금을 지불하겠다고 해도, 우리는 한 가족이기 때문에 이런 때에 서로 힘껏 도와야 한다고 하면서 사양했다. 그렇다! 위기에 가족의 사랑은 더욱 크고 아름답게  꽃피는 것이다.<br /> <br /> 딸의 도움으로 인하여 아침은 계란에 도마도와 양파를 썰어 넣어서 만들어 계란 찜을 만들어 먹고, 곁들여 브로콜리와 당근 그리고 호박을 스팀에 쩌서 먹는다. 점심과 저녁도 거의 양식에 가깝게 먹는다. 이번 사태로 인하여 일생에 처음 경험하는 식생활 습관이 되었다.<br /> 그리고  큰 외손녀 나오미는 가끔 손수 빵을 굽고, 핏자도 굽고, 생일 케익도 만들어서 보내 주었다. 그리고 우리들이 김치찌개를 좋아하는 것을 알고 고등학교 1 학년인 나오미가 김치국을 끓여서 가지고 오기도 했다. 늘 전화로 필요한 것이 있으면 음식이건 식료품이건 알려 달라고 해서, 우리 부부는 큰 외손녀를 가정 총무라고 부른다.<br /> 우리가 당면했던 위기는 삶의 습관, 생활 방식을 바꾸어 놓곤 한다. 이것이 부정적이 아닌 긍정적인 면이라면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다. 이 기간을 통하여 우리는 가족의 유대 관계와 관심이 이전보다 더욱 강화된 것이다. 과정은 힘들었지만 그 과정을 통하여 가족 관계를 강화된 것에 대하어 하나님께 감사한다.<br /> 다행히 코로나19 백신이 조기에 나와서 우리 부부는 2월 24일에 2차 접종까기 마쳤다. 딸과 16살 된 큰 오손녀도 지난 주에 2차 접종을 마쳤다. 사위는 병원에서 일하므로 백신접종 초기에 맞았다. 우리들 뿐만 아니라 이곳 북가주에 약 80%까지 접종을 끝낸 카운티들이 늘어남에 감사를 드린다. 그 결과 매우 엄중했던 거리두기가 점차 완화되고 있어서, 교회 모임도 식당도 점차 제한이 완화 되고 있음에 감사한다. 아마도 7월 초순에는 집단 면역이 형성 되리라고 예측을 한다.<br /> <br /> 글을 마치기 전에 내가 참으로 감사한 일에 대하여 한 가지를 더 나누고자 한다. 이곳 노인 아파트에 인접한 대학에서는 식료품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하여(특히 노인층)상자에 정성들여서 넣은 정결한 식료품, 야채, 계란, 과일 그리고 우유등이 든 것을 공급한다. 누구나 신분증만 보여주면 아주 친절하게 자동차에까지 싫어 준다. 나도 이곳 아파트 주민의 소개를 받아 지난 주에 한 번 방문했다. 내가 놀란 것은, 상자를 자동차에 실어 주는 동안에 한 자매가 따뜻한 커피와 도넛이 든 상자를 내 앞에 가지고 와서 운전석에 앉아 있는 나와 옆에 앉아 있는 집사람에게  커피와 도넛을 집으라고 친절히 말해 주었다. 아직도 다른 사람이 손을 대어서 집어주는 것은 위험함으로 내가 직접잡도록 하는 것이다. 너무나 놀랍고 감사했다. 식료품을 준비해 주어 나누어 주는 것도 감사한데, 맛 있는 커피와 봉투 안에 넣은 양질의 도넛까지 대접한다니…. 따뜻한 커피처럼 마음이 뜨거워졌고, 커피 향 같은 은은한 감사가 마음에 가득찼다. 이런 것이 정말로 마음을 움직이는 사람들이 하는 일의 본보기가 아닐까 한다. 섬기시는 분들은 그들에게 오는 노인들이 도움을 받으러 오는 사람이 아니라, 그들이 섬겨야 할 귀한 대상으로 보는 것이다. 한 잔의 따뜻한 커피와 정성들여 봉투에 넣은 하나의 도넛이 돈으로 친다면 얼마나 뙬까? 아니다. 그것은 돈의 양에 비례되는 것이 아니다. 그 안에 담긴 사랑과 섬김의 봉사 정신의 값은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정신적 가치에서 온 것이다!<br />  <br />                                                                                                        <br />                                                                                                                                                                              (2021.05.09)<br />  <br />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뜻 깊은 생일http://paulleemoksa.com/bbs/pid/133/detail/id/10942<br>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뜻 깊은 생일<br /> <br /> 내 생일은 나는 물론 나를 낳아주신 어머님도 잘 모르신다. 조금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지만, 4남 2녀를 두신 어머님은 구 한말 시대(1902년)에 경기도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나셔서 학교를 다니신 적이 없으시다. 내가 세상에 태어날 당시에는 아이가 태어나도 곧 출생신고를 하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병원이 아닌 집에서 태어난 아기가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세상을 떠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두어 살이 지나서야 출생 신고를 하는 분들도 있었다는 말도 들었다.<br /> <br /> 출생 신고를 하러 가서 생일을 물으면 그 당시에는 매우 익숙한 음력으로 몇 일이라고 하면, 서기가 그것을 양력으로 바꾸지 않고 그냥 적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게다가 나의 형제들 가운에데는 생일이 음력으로 나와 같은 달을 가지고 있는 형제들이 셋이나 있다. 어머님께서 호적을 하러 가셔서 불러주신 생일이 정확하지 않다는 것을 어머니도 인정하신다. 내가 나이가 들어서 어머니에게 자세히 물어서 아마도 그 달 어느 날에 내가 태났을 것이라거 하시는 음력 생일을 당시의 양력으로 찾았다. 내가 현재 나가는 교회나 소속된 단체에 속한 분들이 알고 축하해 주시는 생일은 법적으로 내가 태어난 것으로 기록하는 음력 생일이다. 하지만 나의 가족들이 기억하고 축하해 주는 생일은 양력으로 찾은 다른 날이다.<br /> <br /> 나와 함께 복음 사역을 하고 있는 목사님이 우리 부부가 사는 아파트를 방문하시겠다는 전화를 주셨다. 그러나 COVID-19 사태로 인하여 많은 노인들이 모여 살고 있는 아파트를 방문하는 것을 가능한 함으로 오시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답을 드렸다. 그래도 굳이 오셔야 한다기에 그 이유를 물으니, 전에 아내가 된장을 담은 것을 목사님께 드린  적이 있는데, 그 된장으로 국이나 찌게를 만들어 드실 때마다 드실 때마다 우리 부부를 한 번 대접하기로 생각 했는데, 전화를 주신 그 날에 마지막으로 된장국을 끓이게 되어서, 그것의 일부를 가지고 오시겠다는 것이다. 아무리 말려도 꼭 오시겠다고 하시기에 집에서 멀지 않은 우체국 주차장에서 만나기로 하였다.<br /> <br /> 약속한 시간에 약속한 장소로 가니 벌써 도착해 계셨다. 준비해 주신 된장 우거지국을 주셨다.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받고나서 발길을 돌려 내 자동차로 가려도 돌아서는데, 잠시 기다리라고 하시면서 자동차 트렁크를 여셨다. 그 안에 실려있는 한국산 최상급 배 한 상자와 집에서 담근 김장 김치와 집에서 만든 무 단무지와 압력 밥솥에 찐 맛 있는 계란 20여개를 듬뿍 안겨 주셨다. 그리고 최상급 소고기를 잘 쓸어 담은 큰 접시도 주셨다. 원래 손님 대접하기를 후하게 하시는 분이지만 된장 한 그릇 드리고 받는 것이 너무나 엄청나서 송구스러웠다.<br /> <br /> 내가 아파트로 돌아오니, 마침 저녁 준비를 할 시간이었다.  집사람에게 목사님께서 주신 것들을 전해주니 이내 열어 보면서 매우 놀랐다. 정성드려 준비하신 음식들에 대하여 무엇이라 감사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선물 받은 것으로 맛있게 저녁을 먹으면서 집사람에게 내가 이렇게 말했다. “아마도 목사님께서는  우리 가족이 지키는 나의 양력 생일을 알아내시고는, COVID-19사태로 인하여, 식당에서 생일을 축하해 주실 수 가 없어서 집에서 우리 부부가 단촐하게 생일을 잘 지내라고 보내신 것이 아닌가?” 하며 대화를 나누었다. 푸짐한 음식을 선물로 받은 그 다음 날이 가족이 지켜주는 나의 생일 날이었다.<br /> <br /> 그 다음 날에 감사의 전화를 드리면서 알게 된 것은 내 생일과 관계 없이 베풀어 주신 사랑의 손길임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COVID-19으로 인하여 가까이 사는 딸네 식구와도 함께 식사할 수 없는 우리 부부의 형편을 아시고 생일 전 날에 지금까지 갖지 못했던 방법으로 풍성한 생일 잔치를 갖게 하여 주셨다. 참으로 감사하다!<br /> <br />                                                 ***  ***  ***<br /> 자동차로 약 20여분 떨어진 곳에 사는 딸의 자녀 중에서 15살난 맏 외 손녀 나오미에게서 내 호적에 기록된 생일 날에 다음과 같은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br /> <br /> Hi, Grandpa!                                                                                                      <br /> Happy birthday. I hope you have a great day today.                                                   <br /> This weekend, I will make you yummy cake and bread and soup to celebrate your birthday.  <br /> Thank you for always taking care of me. When I was a baby thank you for taking to me music class. Thank you for walking with me in Hoboken.<br /> <br /> Thank you for always praying for me. I really appreciate everything you do for me.        You and grandma are the best grandparents ever and I am so grateful to have such amazing people in my life.  <br /> I pray for you (and grandmas) health and happiness.                                                <br /> I love you guys so much.            <br />  <br /> 처음 태어난 외손녀를 아끼고 사랑하지 않을 할아버지 할머니가 어디 있을까?<br /> 돌아보면 할아버지로 사랑하고 아낀 것 밖에는 특별하게 한 것이 없다. 그런 나의 태도에 대하여 매우 깊이 감사하는 글에 마음이 뭉클했다.<br /> <br /> 가족이 내 생일로 지키는 날 저녁에 나오미가 직접 만든 맛 있는 생일 케익과 푸짐한 김치찌개와 손수 만들어서 구운 커다란 피자 한 판을 가지고 내 딸과 함께 노인 아파트로 찾아왔다. 가능한 한 외부인의 실내 출입을 금하기 때문에 주차장에서 반갑게 만나 축하 인사를 나누고 푸짐한 음식을 남기고 가기 전에, 또 다른 손녀인 13살인 이반젤린이 캔버스에 정성껐 그린 그림과 9살인 캐리스가 만든 열쇄 고리를 선물받았다. <br /> <br /> 비록 가족이 모여 생일 케익을 자르고 함께 즐거운 식사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그 어느 생일보다도 더 큰 사랑과 격려를 받은 귀한,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뜻 깊은 생일 잔치였다.<br /> 이에 더하여 동역하는 목사님께서 내 생일을 알지 못하셨지만, 푸짐한 음식을 전달해 주신 것은 부족한 사람을 사랑하시는 주님의 섬세하신 손길을 느끼는 귀한 시간이었다. 후로리다 주에 사는 아들네 식구와는 생일 날 저녁 전화 영상으로 생일 축하를 받았다. 나의 일생에 놀라운 은혜를 배푸신 하나님과 부족한 종을 정성을 기울여 대접하신 목사님 그리고 마음씨 고운 사위와 딸 그리고 세 외손녀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br /> 지난 해에는 나를 비롯해서 온 가족이 생일 모임을 갖지 못했다. 집사람의 건강의 문제가 있어서 병원을 오가야 하는 일도 있었지만 COVID-19 사태로 함께 만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금년에도 비록 함께 모일 수는 없었어도 나의 삶에 매우 뜻 깊게 지낸 생일 날로 기억 될 것이다.<br /> <br />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편 118:1)<br /> <br />                                                                                                                                       (2021. 03. 09)​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휄로십 프라자의 겨울 모습http://paulleemoksa.com/bbs/pid/133/detail/id/10899<br>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휄로십 프라자의 겨울 모습<br />  <br /> 지난 해 11월부터 금년 1월 25일까지 단 세 차례 비가 왔다. 예년에 비해서는 도저히 비교할 수 없는 숫자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강수량을 비교할 바가 안 된다. 세 번에 걸쳐서 온 비는 그냥 가랑비 수준으로 두세 시간 내리고 멈추고 말았다. 전에는 비록 가뭄으로 고생한 해에도 몇 차례의 장대비가 내렸다. 왼 일일까? 지난 해 초부터 세차게 닥쳐온 COVID-19 여파로 인하여 집에 머물러야 하는 답답함을 시원한 비라도 내리면 좋으련만, 금년 겨울은 그냥 답답함의 연속이다. 이맘때면, 노인 아파트에 물을 주는 잔디밭이 아니라도 맨 땅에 푸른 풀들이 싹이 나고 자라고 먼 산의 누런 풀들이 파란 색 옷으로 갈아입는 때이다.<br />  <br /> 금년 1월 17일 오후 5시 기온은 73도 이였다. 1월 하순에 초여름의 날씨로 살고 있다니 정말로 이상 기온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일기 예보에는 1월 26일부터 비가 올 것이라고 하는데 얼마나 올지는 두고 볼 일이다.<br />  <br /> 우리 부부가 휄로십 프라자에 입주한지가 8년이 조금 지났다. 세월이 실로 광음처럼 빨리 지나갔다. 내가 사는 유닛은 A 동 202호실이다. 주차장으로 가는 분들이나 아파트 단지를 걷는 분들, 또는 단지 밖으로 걸러 나가는 모든 분들이 눈 안에 들어온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이 아파트 단지에서 가장 좋은 유닛에 산다고 말하기도 한다.<br />  <br /> 산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아파트는 많은 나무들이 있고, 주위 동네도 널찍하고 나무를 많이 심은 저택들이 늘어서 있다. 노인 아파트에 입주한 여러분들이 좋은 환경을 만끽하며 매일 걷는 분들이 많다. 그 중에 매우 특징이 있는 분들에 대하여 적고자 한다. 이 글을 쓰면서도 안타까운 것은 이 글에 나오는 분들이 대부분은 그 모습을 지금은 볼 수 없든지 아니면 아주 가끔 볼 수 있지만 매우 연약해진 모습이다.<br />  <br /> 우리 부부가 독수리 할머니라고 부르는 분이 있다. 이분은 미국 할머니인데 약 80여세 되신 분이다. 매일 낮 12시 경에 뙤약볕을 받으시며, 아파트 밖으로 나가서 약 1시간 정도 속보로 걸으시는 분이시다. 매부리코에 흰 머리를 날리시며 상의는 소매가 파진 흰 셔츠를 입고 힘차게 걸어가시는 모습이 독수리를 연상하게 한다. 우리 생각에 이 할머니는 100세 시대를 사시는 분 같았다. 그런데 지난해 8월경부터 독수리 할머니를 뵐 수가 없었다. 할머님이 타시는 차는 빨간색 현대 액센트 인데 그분의 주차장에는 늘 주차 되어 있었다. 그 후 어느 날 오후 도우미의 도움을 받아 보행기를 미시면서 한발 한발 내딛으시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한두 주 이후에는 그렇게 걸으시는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br />  <br /> 우리 부부가 반바지 아저씨라고 부르는 중국 할아버지가 계셨다. 우리들이 이렇게 부르는 것은 그 분들의 이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할아버지는 우리 부부가 입주할 때에 굽은 허리에 반바지를 입으시고 주로 자전거를 타시는 것으로 운동을 하셨다. 나중에는 힘들고 위험하기 때문인지, 걷기로 운동을 하시었다. 허리가 많이 굽으시고, 발도 많이 휘어서 걸으시는 모습이 어색하셨다. 한 네 달 전에 보행기에 의지하여 억지로, 억지로 발걸음을 떼시면서 걸으시는 모습을 보았다. 그 후에는 모습이 보이지 않고 그분이 사시는 아파트에 불이 꺼져있을 때가 많아서 매우 염려가 되었다. 나중에 들리는 소식은 그 즈음에 세상을 떠나셨다는 것이다. 요사이는 그 부인 되는 분이 아주 외로운 모습으로 혼자 수심에 차서 동네 주위를 걷는다.<br />  <br /> 겨우 지팡이에 의지해서 걸으시는 80대 중반 되는 중국 할머니가 있다. 우리 부부는 아침 7시 30분경에 걷고, 오후에는 4시 반 경에 또 한 번 걷는다. 이 노인 단지에는 여러 종류의 주거 시설들이 있다. 양로병원, 노인들이 세 들어 살고 있는 시설 좋은 아파트, 혼자 생활할 수 없어서 식사와 의료를 제공하는 값비싼 요양원 그리고 연립 주택에서 사시는 분들이 있다. 건물마다 집마다 예쁜 꽃들이 사시사철 만발한다. 오후에 걸을 때에 한 중국 할머니를 만날 때면, 아파트 단지를 도시면서 꺾은 예쁘고 탐스런 꽃 한 송이를 꼭 들고 행복한 모습으로 걸어오신다. 남의 정원이나 건물 주위에 있는 꽃을 꺾으면 안 되는 것을 모르시는 것 같다. 그래서 어느 날 집사람이 그 할머니에게 “꽃을 꺾으시면 안돼요.” 라고 말했지만, 할머니가 잘 못 알아들으시는 것 같았다. 이 할머니도 한 여섯 달 정도 못 만나고 있다. 코로나 사태로 인하여 방에만 계시기 때문인지, 아니면 편찮으신지 모르겠다.<br />  <br /> 우리 부부가 공주와 머슴이라고 부르는 부부가 있다. 중국분이신데 우리 부부 나이 정도가 되는 것 같다. 부부가 매우 조용한 성격이라서 중국 사람과 만나도 별로 대화를 하지 않는다. 아침과 저녁에 두 분이 걸으시는데, 특징은 부인이 몸을 곧게 세우시고 앞장서서 걸으면, 남편은 훤칠한 키에 허리를 조금 수그리고 땅을 보면서 더운 여름에도 엷은 자켓을 한 손에 들고 두세 발자국 정도 뒤를 따라서 걷는다. 그래서 공주님의 뒤를 따르는 머슴 같은 느낌이 드는 분들이다. 몇 달 전부터는 남편 되시는 분이 건강상의 이유에서인지 걷지 않더니 요즈음 지팡이를 짚고서 혼자서 천천히 걷는다. 부인 또한 한참 동안 안 보이다가 혼자서 천천히 걷는다. 참으로 외로워 보인다.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 이후에 방에 오래 있게 되고 서로의 사귐이 단절된 상태가 장기화 되면서 노인 아파트 입주자의 정신적 육체적 건강이 많이 나빠지는 것이 눈에 뜨인다.<br />  <br /> 늘 손을 상의 호주머니에 넣고 땅을 보면서 천천히 걷는 중국 아저씨가 있다. 잘 웃지를 않으신다. 또한 중국 분들과 만나도 거의 말을 하지 않는다. 늘 사색하는 듯한 표정을 짖고 살기에 철학자라고 부른다. 이분의 부인은 자그마한 키에 날렵한 체형을 가진 분이다. 두 분이 함께 걷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부인 되는 분은 걸음걸이가 빠르고 혼자서 멀리 다닌다. 앞으로만 걷는 것이 아니라 뒤로도 걷고 때로는 발을 왼발과 오른 발을 옆으로 교차해서 걷기도하는 부지런한 분이다. 그러나 약 3개월 전부터 철학자의 부인을 볼 수가 없다. 그 이유는 잘 모르겠다. 건강이 좋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자녀 집에 가서 머무는지도 모른다. 요즈음은 철학자 아저씨께서 가끔 짧은 시간 혼자 천천히 외롭게 수심에 찬 모습으로 힘겹게 걷는다.<br />  <br /> 러시아 사람으로서 80대 중반으로 보이는 삼총사 할아버지들이 있다. 우리가 이 아파트에 이사 온 8년 전, 이른 아침이면 세 분이 서로 아파트 밖으로 나가서 약 한 시간을 걷고 들어 왔다. 한 삼년 간 지속되다가 세 분 가운데 한 분이 건강이 좋지 않아 빠지게 되었다. 이분은 지금도 아파트 밖을 거의 나오지 않고 사신다. 그래서 삼총사 할아버지들의 결속은 와해되어 다른 두 분은 따로 따로 아침마다 꾸준히 걸으셨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 몸이 야윈 한 분은 약 2 개월 전부터 보이지 않아서 걱정이 되었다. 그 후 얼마간은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걷다가 요즈음은 볼 수 가 없다. 세 분 가운데서 가장 크고 몸집이 좋은 할아버지는 아파트 밖으로 나가서 걷는 것을 중지하고 아파트 단지 안에서 천천히 한 바퀴 정도를 걷고는 들어가신다. 세 분의 건강 상태가 코로나 사태 이후에 많이 나빠졌음이 눈에 확연하게 띈다.<br />  <br /> 우리 부부가 사는 A 동 202호실 바로 앞에 있는 201호에는 80대 후반의 이란 할아버지가 홀로 살고 있다. 시간이 무료해서인지 가끔 작은 개를 데리고 와서 지내곤 한다. 이 할아버지는 약 한 시간 이상을 이 아파트 단지를 돌고 또 도신다. 몸집이 매우 좋고 건강하신 분이다. 그런데 그렇게 잘 걷던 분이 코로나 사태 이후에는 한 6개월 정도는 두문불출 하셨다. 그러다가 갑자기 이 할아버지가 나와서 걷기를 시작하였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렇지 않아도 배가 많이 나온 분이셨는데, 걷는 것을 아예 중단하고 방에만 오래 계시다가 체중이 많이 늘었음이 확실히 눈에 띄었다. 그래서 우리 부부가 동시에 말하기를 임신 10개월을 넘어서 11개월이 된 분 같다고 하면서 심히 놀랐다. 그러나 한 3주 정도 열심히 운동의 하시더니 다시 두문불출하고 계신다. 가끔 큰 기침 소리가 들려서 건강이 좋지 않으신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br />  <br /> 아주 부지런한 80대 후반의 중국 할아버지가 같은 건물 3층에 사신다.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 이전에는 아침이면 가방을 메고서 체육관을 다니시며 부지런히 건강을 관리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나 코로나 사태로 인하여 체육 시설이 문을 닫게 된 이후에는 이른 새벽이면 혼자서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서 약 한 시간을 속보로 다녀오셨다. 얼마나 빨리 걸으시려고 노력하시는지 상체가 앞으로 많이 나오게 되니 자연히 엉덩이는 뒤로 하여 달리듯이 걸으신다. 공기를 가르는 자세로 땀 흘리며 걷는 모습이 존경스럽다. 이 할아버지의 이름을 모르기 때문에 우리 부부는 ‘급히 화장실 가는 할아버지’라고 부르곤 한다. 그런데 이 할아버지도 약 3개월 전부터 볼 수 가 없다. 건강이 좋지 않으시던지, 아니면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행 하느라고 아파트에서 나오지 않기 때문인지는 모르겠다.<br />  <br /> 이상에 기록한 분들 이외에도 다른 여러분이 계신다. 실로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는 노인 아파트에 사시는 분들에게 매우 치명적인 타격을 주고 있음을 본다. 감염의 두려움으로 인한 격리, 그로 인한 운동 부족과 영양상태의 빈약함 또한 오랫동안 이웃과도 소통하지 못한 채 약 1년을 살아오면서 갖는 고독감 등 여러 요인들이 노쇠 현상을 더 앞당기고 있음을 본다. 지금까지 강우량이 아주 작은 이 겨울 날씨로 인한 환경과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로 인하여 이곳 노인 아파트에 사시는 분들의 건강 상태는 지난 8년간 경험하지 못한 매우 서글픈 모습이다. 이 긴 어두움의 터널을 지나가면서, 언젠가 다가올 광명한 출구가 있음을 믿고 인내하며 살아가야 하리라.<br />  <br /> (2021. 01.25)<br />  <br />  Name Labelhttp://paulleemoksa.com/bbs/pid/133/detail/id/10878<br>Name Label<br />  <br />    비교적 편지나 카드를 자주 쓰는 나로서는 내가 사는 아파트의 주소를 쓰는 것만 해결되어도 시간이 절약된다. 여러 통의 편지에 수신자의 주소를 쓰는 것도 신경이 쓰이는데, 작은 글씨로 내 주소를 반복해서 쓰지 않기 위해서 전에는 스티커로 된 저렴한 네임 레이블을 주문해서 썼다.<br />    아들이 이락 전투에 파병 되었을 때라고 기억한다. 어떻게 알았는지 아니면 우연히 연결 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 즈음에 DAV 라는 미국 상이군경 단체에서 후원을 요청하는 인쇄물과 함께, 친절하게도 내 이름과 그 당시 내가 살던 곳의 주소로 인쇄 된 네임 레이블이 동봉되어 왔다. 외국에 파병된 아들을 둔 아버지로서 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서 그 때부터 얼마 전까지 정기적으로 후원을 했다. 아들에 대한 마음 때문만이 아니라, 나도 젊은 시절에 한국군으로 월남전에 파병되었던 경험이 있어서 적은 금액이라도 상이용사들을 돕는 것은 마땅하다고 생각했다.<br />    그런데 DAV를 후원한지 약 2년 후부터 다른 여러 전상자들을 돕는 단체들에서 우편물이 오기 시작했다. 이런 저런 물건과 함께 보내는 편지에는 거의 예외 없이 네임 레이블이 약방의 감초처럼 꼭 같이 왔다. 그 후에는 미국의 이곳 저 곳에 있는 여러 원주민 학교들에서도 오고, 병원에서도 오고, 지역 사회에 있는 여러 구호단체며, 빈곤한 사람들에게 식품을 공급하는 Second Harvest, 구세군, HABITAT, KQED 공영 방송국, 미국 성서 공회에서 군인들에게 성경 보내기 운동 홍보, 미국 치매 협회, 미국 심장 협회 등 약 30 여 군데서 쉴 사이 없이 오는 홍보물들을 하루에도 몇 통을 받는 날이 많다.<br />    이런 단체에서 보낸 네임 레이블은 이제 너무나 많아서 여러 큰 봉투에 가득가득 모아두고 있다. 나의 남은 날들이 얼마일지는 몰라도 같은 주소에서만 산다면 수 십 년을 쓰고도 남을 것 같다. 그 외에 작은 메모지, 달력 또는 수건, 양말, 볼펜 등등의 선물도 함께 오기도 한다. 이런 물건을 받으면 마음이 약해져서 적은 액수라도 후원금을 보내왔다. 그러나 머지 않아서 포화상태에 이르렀다. 그래서 지난 해에는 한 달에 한 곳을 정해서 후원을 해 보기도 하였다. 그러다 보니 못 보내는 다른 단체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많이 들었다. 그렇다고 모든 단체들을 다 도울 수 있는 형편이 되지 않는 나로서는 돕는 단체들을 정리하여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br />    금년부터는 내가 사는 도시의 구호 단체인 City Team, 구세군, 내가 속한교단의 구호사업, Compassion, Second Harvest 같이 재정 사용이 투명하고 또 확인할 수 있는 단체와 연결하여 적은 금액이라도 계속 후원하고자 한다. 공교롭게도 이상에 열거한 단체는 네임 레이블이나 선물을 보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얼마나 정확한 보고인지는 모르겠으나 가끔 재정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에 대한 도표들도 보낸다. 내가 잘 결정한 것인지는 나 자신도 모르겠다. 내게 오는 모든 단체들을 다 도울만한 여유가 있지도 않고, 내가 보낸 후원금이 어떻게 쓰이는지도 모른 체, 네임 레이블이나 다른 선물들이 온다고 해서 미안한 마음에 할 수 없이 한다는 것도 좋은 것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지내다 보면, 언젠가는 내게 계속해서 후원금을 요청하는 단체도 점차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된다.<br />  <br />  <br /> (2021.01.04.)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성탄절 풍경http://paulleemoksa.com/bbs/pid/133/detail/id/10875<br>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성탄절 풍경<br />  <br />    지금부터 약 8년 전인 2012년 12월 18일에 내가 지금 사는 노인 아파트에 입주하였다. 이 아파트가 있는 곳은 산 지락 옆에 있는 부촌에 속하는 곳이다. 매우 큰 저택들이 주위에 둘러 있다. 성탄절이 되면 각 집마다 매우 휘황찬란한 장식들과 조명을 달뿐만 아니라, 조명을 달기 좋은 형태로 생간 나무가 있으면 밑에 있는 가지로부터 아주 높은 꼭대기 까지 온통 장식전구로 옷을 입히고 가지의 맨 끝에는 크고 밝은 별들을 달았다. 내 생각에는 주인이 이런 장식을 한 것은 무리일 것이고, 용역 업체가 와서 사다리 차 같은 것을 사용하여 장식을 했을 것으로 추측한다.<br />    내가 사는 아파트에서 바로 앞에 보이는 저택의 정원에는 사람의 손으로 만든 각종 새와 다람쥐나 펭귄 토끼 등 수백 개를 잔디와 넓은 나무숲으로 된 온 정원에 장식한 집이 있다. 그 집의 성탄 장식을 전에는 차도 주위에도 했는데 거대한 원형 조형물에 불빛들이 물결치듯이 움직이는 진기한 풍경을 만들었다.<br />    그러나 금년 아파트 주위는 물론 주위 동네에 지난해와 같이 장식한 집은 오직 한 집뿐이다. 왜 이런 성탄절 풍경이 되었을까? 내 생각에 이런 주택을 갖고 사는 분들이 장식할 돈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약 10여 개월간 COVID-19로 인하여 사람들마다 사기가 많이 저하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하여 백화점이나 식당이나 각 소매점의 경기가 바닥나고, 사람을 만나면 서로 이리저리 피해서 가는 일상이 계속되다 보니, 서로 만남과 대화와 삶의 일상을 나누는 기쁨들이 거의 사라진 현상이 되었다. 이 곳의 모든 교회에서 성탄 축하 찬양의 밤이나, 24일 성탄절 전야 예배도 드리지 못하는 정말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현실이 된 것이다. 심지어 나의 경우에도 성탄절에 가까이 사는 딸네 집도 방문하지 못하니 마음이 안타깝다.<br />    나도 매년 성탄절이 되면 20여분 거리에 사는 사위와 딸에게 그리고 세 명의 외손녀들과 가까운 분들에게 직접 드릴 선물을 사러 백화점을 가곤 했다. 성탄절 장식이며 크리스마스 캐롤과 오가는 많은 사람들의 밝은 표정들이 참으로 좋았다. 그리고 성탄절이 끝나면 반품하는 사람들과 거의 반값에 파는 물품들을 사느라고 인산인해를 이루는 장관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러나 금년에는 아예 생각할 필요도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br /> <br />    금년도 성탄절에는 캘리포니아 주에서 급속도로 퍼져나가는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로 인하여 노인들의 외부 출입 자제를 강력히 요청하기 때문에 거의 매일을 아파트에서 나가지 않았다. 그래서 쉬는 시간에는 독창이나 합창으로 부르는 성탄절 찬송이나 기악으로 연주된 성탄절 찬송들을 유 튜브를 통해서 그 어느 때 보다도 많이 들으면서 은혜를 많이 받았다. 그 프로그람을 제작해서 올린 분들의 찬양 가운데서 첫 곡이 ‘오 거룩한 밤’ 이 많았다.<br />    내가 ‘오 거룩한 밤’ 찬양을 들으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난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36년 전 부활 주일에 미국에서 첫 번째로 교회를 개척한 그 해인지 아니면 다음 해인지 자세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성탄절 예배 때에 찬송을 잘 부르지도 못하는 내가 용기를 내서 ‘오 거룩한 밤’을 독창으로 부른 적이 있었다. 교회를 개척하고 점차 성장하던 그 때에 있었던 감격 때문일지도 모른다.<br />    그러나 요즈음 내가 ‘오 거룩한 밤’ 찬양을 들을 때마다 느끼는 것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지금 그 밤에 주님이 나셨기 때문에 모든 밤들에게서 구별하여 거룩한 밤이라고 부르지만 참으로 안타깝고 마음 아픈 밤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마리아가 첫 출산을 할 때에 그 시대상이 어떠했는가? 아기를 낳는 산고를 보고도, 듣고도 누구하나 깜짝하지 않고, 자기 방을 비워 산모를 보호하고 아기를 따뜻하게 누일 자리를 양보하는 사람이 없는 비정한 사람들이 우글대는 무정한 밤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하나님의 아드님이시며, 왕 중 왕이신 예수님이 나셨는데, 이 땅에 오셔서 누우신 첫 자리가 말구유라니..... . 슬프다. 아니 그 밤에 낳은 아기가 예수님이 아닐지라도 그렇다. 어떻게 모인 사람들이 다 한 다윗의 가문에 속했기에 호적 하러 베들레헴에 모였을 터인데 이렇게 비정할 수가 있단 말인가? 이런 무지막지하며 무정하고 비정한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을 구원하려 한 아기로 오신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비참한 가난을 경험했던 사람이라면 생활이 낳아졌어도, 힘들어 하는 사람을 보면 자기가 경험했던 그 아픔 때문에 그냥 지나갈 수 없는 것과 같은 심정이 되는 것이다.<br />    정말로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빌립보서 2:6-7). 내가 ‘오 거룩한 밤’ 찬양을 들을 때에 애틋한 마음이 들어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은 인간을 위하여 마구간에 나신 주님의 상상할 수도 없이 낮아지신 그 모습을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추운 밤에 강보에 싸여 말구유에 누우셨던 주님의 모습을 상상하기 때문이기도 하다.<br />  <br />    그러나 성탄절에 대한 뉴스를 읽다가 눈을 의심할 만한 한 기사를 발견했다. 다름 아닌 구제 기금에 대한 모금 현황에 대한 것이었다. 이 기사를 읽은 후에, 내가 주 안에서 교제하는 구세군 사관님에게 금년 금년에 구세군 자선냄비 모금액이 예년과 차이가 있는 가를 물어 보았다. 이렇게 실직자가 많아졌고, 가계 수입이 바닥을 치고 있는 어려운 이 때에 의례히 우리들의 생각에는 분명히 많이 감소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사관님의 대답은 의외였다. 지난 해 보다 더 많이 모금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기적이 아닌가!<br />    내가 본 기사에는 여러 단체들에 대한 모금 현황이 예상외로 많이 증액되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대략 3-20% 씩이나 증액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불안정하고 수입이 보장되지 않은 사람이 많고 힘이 들어도, 또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동참하고자 손을 펴는 따뜻한 사랑을 가슴에 간직한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큰 감동을 받았다. 미국 전역에 노인들이나 직장을 잃은 사람들을 위하여, 한 주에 한 두 번씩 식료품과 야채가 든 박스를 나누어 주는 여러 단체들이 있다. 이 지역에서 가장 큰 비영리 단체로서 이런 일을 활발히 Second Harvest 라는 단체가 하는 일을 보면 수많은 자원 봉사자들이 정성껏 물품을 상자에 넣어서 쌓아놓고 자동차에 실어 주기까지 한다. 이런 단체에 그 도시의 수퍼 마켓이나 주위 농장 그리고 식료품을 만드는 회사들에서 아주 신선한 야채나 물품들을 많이 보내준다는 것이다. 그 기사에는 농장에서 차들이 야채를 가지고 줄지어 구호 단체의 창고로 들어오는 사진이 실렸다. 정말로 감동적이다! 성경 말씀처럼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손길들 “주는 자가 받는 자 보다 복되도다.”라는 말씀처럼 사랑의 손길을 펴신 분들에게 하나님의 크신 은총이 함께하실 것을 믿는다.<br />  <br />    나도 약 15년 전부터 Church Health Academy라는 단체를 조직해서 건강한 교회가 되도록 섬길 일꾼들을 세우는 일과 함께 장학금과 개척교회 교역자들과 선교 단체를 후원하는 일을 해오고 있다. 누구나 예상하는 바와 같이 나도 금년은 계획한 예산에 많이 미달할 것이라는 생각을 해 왔다. 그런데 결코 그렇지 않았다! 평균적으로 12월에 모아졌던 후원금을 훨씬 넘어서 약 30%가 증액되었다. 놀라운 것은, 요즈음 사업을 경영하시는 분들의 형편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누구나 다 안다. 그러나 후원하신 분들은 이러한 여건 가운데서도 더욱 힘써 물질을 하나님께 드리시는 진정한 믿음을 실천하신 분들이기에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참으로 감사하다!<br /> <br />                                                                         (2021년 1월 3일)고 박창환 학장님을 추모하며http://paulleemoksa.com/bbs/pid/133/detail/id/10845<br><u>하나님의 넘치는 축복 가운데 주님께로 가신 박창환 학장님</u><u>.</u><br />  <br /> 고 박창환 학장님께서 아직 건강하시던 90대 초반에 쓰신 회고록의 제목을 ‘하나님이 넘치는 축복 속에 걸어온 나의 삶’ 이라고 붙이셨다. 학장님께서 친히 붙이신 회고록의 제목을 보며, 정말로 하나님이 주님의 품에 안기신 과정도 참으로 .넘치는 축복의 임종‘이셨음에 감사한다.<br />  <br /> 학장님은 부친 박경구 목사님과 어머니 김몽애 사모님이 이루신 가정에서 장남으로 나셨다. 박 학장님의 고향은 이북 황해도 황주군 천주면 외하리 신동에 사셨던 외할아버지 집에서 1924년 3월 19일에 출생하셨다.<br />  <br /> 내가 학장님을 1965년 서울 영락교회에서 처음 뵈었다. 1963년 5월부터 교회에 출석하면서 주일 성서반에 들어가서 성경을 배워 학습과 세례를 받았다. 마침 1965년 봄에 제1기 교사 양성부를 모집하기에 지원하여 주일학교 교사가 되는 훈련을 받았다. 그 때에 신약 개론을 가르쳐 주신 분이 바로 장신대 교수로 계셨던 박창환 목사님이셨다. 신약과 구약, 학생에 대한 이해, 교회사 개론 그리고 어떻게 학생들에게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언어 구사법 등의 과목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제1기에 들어갔지만, 군 입대로 인하여 졸업을 하지 못하고 군 제대 이후 1969년에 다시 양성부에 들어가서 제7기로 졸업을 하였다. 학장님께서는 그 때에도 신약을 가르쳐 주셨다. 그러니까 햇수로는 55여 년 전부에 학장님을 처음 뵌 것이다.<br />  <br /> 교사 양성부를 끝내고 나서 나는 주일학교 고등부 반사로서 봉사하였다. 그 후에 새로 시작한 청년 성서 1반의 성경 강사가 되어 2년을 섬겼다. 성서반이 많이 부흥되어서 나 자신으로는 감당할 수 없음을 아신 교회 평신도 부에서는 박 학장님을 청년 1부 강사로 세우시고 나는 목사님이 하시는 일을 돕는 부감이 되어 청년 1부를 2년간 더 섬겼다. 시간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세히 실제적으로 적용할 수 있게 잘 강해해 주셔서 많은 은혜를 받았다.<br />  <br /> 그 후에 내가 장신 대 신대원에 입학해서 학장님의 수업을 듣게 되었다. 신약학과 헬라어였다. 헬라어를 독학하여 깨우치셨다는 학장님의 탁월하신 실력과 교수법 그리고 열정에 대하여 크게 감동을 받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2 학년 여름 방학 때에, 특별한 크라스를 개설하셔서 자원하는 학생들이 참여하여 무료로 듣도록 하셨다. 그것은 한 주간 동안 하루에 약 2 시간 씩, 주기도문을 헬라어로 풀어서 설명하시면서 강해하시는 것이었다. 뜨거운 여름 뜨거운 A.C도 없는 교실에서 땀을 흘리시면서 가르쳐주셨다.<br />  <br /> 당시에 나는 학교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집 2층에 방 하나를 얻어서 4 식구가 살았다. 아들 삼열이가 유치원에 갈 나이가 되었다. 마침 장신대 부설 유치원이 있었는데, 등록금이며 기타 안내를 받기 위하여 문의하였다. 그 당시 원장님으로는 박 장님의 사모님이신 현수삼 권사님께서 맡고 계셨다. 권사님은 신학생들의 형편을 너무나도 잘 아시고 계셨다. 아주 저렴한<br /> 수업료를 받겠으니 보내라고 하셨다. 그래서 삼열이가 도저히 받을 수 없는 유치원 교육을 받게 되는 복을 누리게 되었다. 지금 삼열이가 만 48세가 되어 4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으니 참으로 오래 전 일이다. 가장 중요한 유년기를 잘 삼열이가 잘 보내게 된 것은 실로 하나님의 은혜요, 학장님과 사모님이 도와주신 은혜임에 늘 감사한 마음으로 살았다.<br /> 내가 미국으로 이민을 올 때에, 학장님의 기도를 받기 위하여 찾아갔었다. 그 후에 나는 이민 생활에 적응을 하느라고 힘들고, 교회를 개척하기도 하고, 청년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단체를 조직해서 전도하면 양육하고 섬기는 일에 힘쓰면서 학장님의 소식을 간간히 접했다. 학장님의 임기를 마치시고 나서, 소련에 있는 장로교 신학교를 섬기시고, 중남미에 있는 니카라과에 신학교를 섬기시기도 하시며, 목회자들의 자질 향상을 위한 기관을 개설하신 일들에 대하여 소식을 들었지만 직접 연락드리면서 소식을 나누지 못했다.<br />  <br /> 2006년 내가 동부 뉴저지에서 산호세로 이사 와서 아는 목사님과 이야기 하다가, 박 학장님께서 미국에 계신다는 소식을 듣고 수소문하여 목사님과 다시 연락하게 되었고 그 때부터 지난 달(2020년11월) 4일까지 전화로 또는 이 메일로 인사도 드리고 보내 주시는 소식도 받았다. 약 8년 전에 이곳 북 가주를 방문하셨을 때에 우리 부부가 만나 뵙고 식사를 대접한 일도 있었다. 그 때만 해도 팔십 후반이셨기 때문에 아주 건강하셨다. 지난 몇 년 간은 장신 대에 가셔서 94세가 되셨을 때까지 친히 학생들을 가르치신 어르신이셨다.<br />  <br /> 2013년 부활 주일을 맞이하여 나의 내가 1980년도부터 써온 시들을 모아 ‘주여! 나의의 생명을’ 이라는 제목의 찬송 시 제1집을 출판하게 되었다. 박 학장님에게 추천사를 부탁하였다. 부족한 나의 글을 읽으시고 추천의 글을 써 주실까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222 수의 찬송 시를 복사해서 박 학장님께 우편으로 보냈다. 놀라운 것은 며칠 후에 학장님께서 이 메일로 추천사를 보내 주셨다. 추천사를 보내시면서, “내가 이 목사님께서 보내주신 시를 다 읽고 나서, 즉시 추천사를 기쁜 마음으로 써서 보내게 되었다.“ 는 글로 시작하셨다. 90세가 되신 연세에 우편물을 받으시자 마자 다 읽으시고, 추천사를 내일로 미루지 아니하시고 격려와 축하를 담은 귀한 추천사를 쓰신 분이셨다. 박 학장님이 제자를 참으로 아끼시는 분이시며, 촌음을 아끼셔서 하실 일은 미루지 않으시고 하시는 분이심을 마음 깊이 새기면서 본 받기로 결심하도록 하신 어르신이시다. 나의 일생에 이런 귀한 학장님을 만나서 배울 수 있고 본받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그리고 삶의 본을 보이신 고 박창환 학장님께 감사한다.<br />  <br /> 박 학장님은 신약성경 새 번역 전문위원으로 위촉받으셔서 주도적으로 번역에 참석하셨고, 공동 새 번역 성경 사업에도 깊이 관여하셨다. 청년의 나이에 장신대 교수로 임직하시기 시작하셔서 은퇴까지 섬기셨고, 그 후에도 가르쳐 제자 삼는 일을 평생 하셨다. 아드님이 사역하시는 네브라스카 주의 오마하에 있는 교회에서 그 도시에 사는 교인들을 위하여 평신도 신학원을 개설하셔서(2년 코스) 친히 1 년간 가르치셨다. 그러나 2020년에는 COVID-19로 인하여 제2년 차 수업을 중지하심에 대하여 매우 아쉬워 하셨다.<br />  <br /> 박 학장님께서 신학교에서 수업을 진행하시다가 가끔 정색을 하시면서, “나는 배움이 적어 여러분을 가르치기에 부족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어서 저와 같은 부족한 사람이 있는 자리에 오셔야 합니다.” 라는 참으로 겸손하신 말씀을 하시곤 하셨다. 박 학장님의 회고록 마지막 부분에 ‘자기 평가’라는 부분이 있다.<br />  <br /> “나는 배운 것도 별로 없고, 따라서 아는 것도 없으면서 아는 척 하는 위선자였다는<br /> 생각도 한다. 사실 나는 학문을 주장하고 장려하는데 남보다 뒤지지 않지만, 참으로<br /> 학문을 할 만한 재간도 능력도 없어서, 하는 척만 한 것이, 나라고 나는 자평한다.“<br />  <br /> 라고 쓰셨다. 그러나 박 학장님은 한국 기독교 100주년을 기념한 행사에서 100주년 기념 신학자로 인정되어 상을 받으셨고 2012년에는 한국 기독교 학술원 학술상도 받으셨다. 참으로 늘 본받아야할 겸손하신 스승이요, 멘토의 모습을 지니신 어르신이셨다.<br />  <br /> 금년 여름부터는 전화를 드리면 잘 듣지 못하셔서 주로 이 메일로 한 달에 두 번 정도씩 안부를 여쭈었다. 그 때마다 즉시 답신을 주시며 늘 기억하고 연락들 주어 감사하다는 글을 보내셨다. 11월 초에, 아드님이신 박선진 목사님의 따님이 중국에 살다가 미국에 들어와서 잠시 목사님 댁에 머물다가 버지니아로 떠나는 따님과 함께 가셔서, 한 주일간 다녀오시게 되었다. 아드님 대신에 박창환 학장님께서 주일 설교를 하시게 되었다고 하시면서, 제게 설교 원고를 보내셨다. 그 내용 가운데 손녀딸을 보내면서 “천국에서 만나자!” 라고 작별 인사를 하셨다는 대목이 나온다. 그 손녀딸이 11월 28일에 가진 추모식에 와서 울면서 할아버지를 회상하는 순서를 맡았다.<br />  <br /> 내가 11월 4일 박창환 학장님께 안부 이 메일을 보냈다. 그 날 답장을 보내셨는데, 보내주신 글을 읽고 무언가 지나가는 예감이 있었다. 학장님은 내가 이제 정신이 맑지 않다고 하셨고, 이제는 컴퓨터 글자 자리를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셨다. 그런데도 내게 답장을 주신 것이다. 그리고 학장님께서 천국에서 만나기를 바란다고 하시고는 마지막에 -친구 박창환- 이라는 글로 마치셨다. 나는 매우 놀랐다. 왜 별 볼일 없는 제자에게 ‘친구‘라는 과분한 호칭을 주신 것일까? 물론 늘 겸손하셨던 학장님께 마지막 까지 낮추시는 분이심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하늘나라에서는 한 믿음의 동역자로 만나 보실 것을 예견하기도 하신 것 같았다.<br />  <br /> 나는 예감이 이상해서 아드님이신 박선진 목사님께 전화를 걸었다. 연세가 드셔서 전과 같지는 않으시지만 잘 계신다고 하셨다. 그러나 박 학장님은 11월 10일 아드님과 함께 교회를 다녀오신 후에 아드님께 내가 주님께 가야하겠으니 준비를 해 달라고 부탁하신 후에 침실로 가셔서 누우셨다고 한다. 박 학장님의 말씀을 들은 아드님은 특별한 병환이 있으신 것이 아니므로 병원에 모시면 오히려 고생을 하실 것 같아서 다른 방법으로 임종을 준비하셨다. 쇼시얼 워커와 호스피스에 연결하여 박 학장님의 상태와 의료 기록을 하여 임종을 준비하셨다. 11월 14일 아침에 박 학장님의 침대 밑에서 매트리스를 펴고 누어있던 박선진 목사님께서 아버님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하여 박 학장님 곁으로 가서 뵈니 곧 운명하셨다. 그 때가 2020년 11월 14일(토) 오전 9시 23 분이었다. 정말로 ‘하나님의 넘치는 축복 속에서 소천’ 하신 것이다.<br />  <br /> 학장님께서 90세 되셨을 때에 ‘나의 아버지 천국에서 제일 먼저 뵙고 싶은 분’ 이라는 글을 쓰셨는데, 아버님 박경구 목사님은 이북 김일성의 외삼촌 강양욱과 숭실대학과 평양 신학교를 같이 다니셨다. 변절자 강양욱 목사는 한 때 고 박창환 학장님의 초등학교 담임선생이기도 하였다. 그가 공산당의 앞잡이가 되어 친구인 박창환 학장님의 아버님을 회유하고자 하였지만, 주님을 향한 일편단심을 꺾을 길이 없자, 감옥에 가두었다. 그 후에 인천 상륙작전으로 인하여 위기를 느낀 공산당원들은 감옥에서 박경구 목사님을 끌어내서 “이 놈은 총알이 아까워서 총으로 쏴 죽일 수는 없다.” 라고 하면서 박경구 목사님의 손발을 난도질하여 토막을 내었고 기관총으로 집단 사살한 사람의 시체들과 함께 불살라 버렸다고 한다. 이 소식은 그 사건을 목격한 증인이 1.4 후퇴 때에 남하하여 박창환 학장님께 전해준 이야기이다.<br />  <br /> 학장님은 아버지를 뵙고 싶은 간절한 글에 이런 말씀을 남기셨다.<br />  <br /> “나의 나이 90세, 무던히 오래 산 셈이다. 아내를 먼저 하늘로 보낸 지도 벌써 만 6년이<br /> 되어 간다. 이 땅에서 나에게 맡겨진 일을 거의 후회 없이 다 했다고 생각하니, 세상에<br /> 더 있어야 할 의무감도 없고, 더 살고 싶은 애착도 없다. 세상에는 나를 반기는 사람이<br /> 거의 없다고 본다. 날마다 특히 밤마다 내 머리에 떠오르는 상념은 어서 하나님께서 나를<br /> 하늘나라고 데려가 주셨으면 하는 것이다. 하늘나라에서 나를 기다리는 분들이 많이 있을<br /> 것 같아서이다. 우선 내 부모님과 북한에서 고통스럽게 살다가 앞서 간 나의 동생들이<br />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 성삼위 하나님을 뵙는 기쁨과 영광을 얻을 것이라는 이론적<br /> 기대가 물론 있고, 많은 신앙의 선배들을 뵙는 기쁨이 클 것이라는 희망이 없지 않지만,<br /> 나의 감정은 누구보다도 나의 가족을 보고 싶다는 솔직한 고백이다. 그 중에서도 나에게<br /> 기대를 걸고 오매불망 보고 싶어 하시다가 뜻을 못 이루시고 하늘나라로 가신 나의<br /> 아버지와 어머니는 나를 기다리고 계실 것이다.“<br /> <br /> 고인이 되신 박창환 학장님은 지금 그렇게 보고 싶어 하시던 부모 형제들을 만나 영광<br /> 중에 계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부르고 계시리라!<br />  <br /> <br />  <br /> (2020 12월 4일)<br />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예배 진행http://paulleemoksa.com/bbs/pid/133/detail/id/10804<br><p>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예배 진행 <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11</span>월 <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1</span>일에<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span></p> <p>   매 년 두 번씩 시간 변경일이 있다<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 </span>그 때마다 한 시간을 뒤로 미뤄야 하는지<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 </span>아니면 앞으로 보내야 하는지가 잠시 혼동 된다<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 </span>가을에 시간 변경일이 오면 밤 <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12</span>시를 한 시간 앞당겨서 오후 <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11</span>시로 하여<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 </span>한 시간을 앞으로 보내는 것이다<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 </span>그래도 미심적어서 아는 목사님께 연락하여 확인을 했다<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span></p> <p>   직장을 출근 하는 것도 아니고<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 </span>일정과 시간이 잡힌 회의나 개인적인 만남을 직접 가질 수가 없어진 때이기 때문에 한 시간을 앞으로 하느냐<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 </span>뒤로 하느냐가 요즈음 같은 때에는 별 의미가 없을 것 같다<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 </span>그러나 아는 목사님께서 내게 어제인 <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11</span>월 <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1</span>일에 주일 예배 때에 하나님의 말씀 증거를 부탁하셨기 때문에 자세히 확인을 해야 했다<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 </span>왜냐 하면 설교를 맡은 내가 시간을 맞춰두지 않아서 늦으면 예배 진행이 어렵게 될 것은 분명할 것이기 때문이었다<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span></p> <p>   그 교회는 내가 사는 아파트에서 약 <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60</span>여 마일 떨어진 곳에 위치한 교회이다<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 </span>혹시 가는 길에 중간에 도로가 막힐지도 몰라서 일찍 떠났다<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 </span>그러나 너무 지나치게 부지런을 떨었는지<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 </span>교회 예배 시간은 오전 <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11</span>시 인데<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 </span>오전 <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10</span>시 <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10</span>분경에 도착했다<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 </span>한 <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30</span>여 분을 기다렸더니 목사님 가족이 도착하셨다<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span></p> <p>   목사님을 기다리는 동안에 시간이 남아서 교회 경내를 이리 저리 다녀보니<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 </span>한 <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7,80 </span>여 년 전에 지은 건물 같은데<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 </span>잘 관리 되어 있고<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 </span>설계한 건축가가 창의적이면서 기능적인 면이 잘 조화시킨 아담한 건물이었다<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 </span>그 교회는 미국인 교회로서 <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COVISD-19 </span>사대로 인한 사회적 거리 두기로 인하여 주일 예배를 모이지 않고 있다고 한다<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 </span>미국 교회를 빌려서 보는 한국 이민 교회는 인원이 적기 때문에 서로 멀리 떨어져서 대면 예배를 볼 수 있는 허가를 받았지만<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 </span>꼭 마스크는 착용하여야 했다<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 </span>예배를 시작할 때에는 <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16 </span>명이 이리 저리 멀리 떨어져서 앉아 있었다<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span></p> <p>   <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16 </span>명이 모였어도<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 </span>두 교회가 연합하여 모인 숫자이다<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 </span>그 교회를 사용하던 교회 목사님께서 사정상 고국으로 돌아 가셨다<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 </span>그 교회는 근처에 대학교가 있어서 한국에서 온 유학생들이 주축을 이룬 교회였다고 한다<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 </span>그런데 <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COVISD-19 </span>사태로 인하여 온 라인 수업이 시작되면서<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 </span>한국에서 온 유학생들의 많이 귀국해서 현재는 <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8</span>명 정도의 학생들만 모이는 교회가 되었다<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span></p> <p>   이런 사정 때문에 교단에서는 그 교회와 가장 가까운 교회와 함께 임시로 합동하여 예배를 드리도록 하였다<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 </span>그 임무를 맡으신 목사님께서는 교회에 모여 목사님이 안 계신 상태에서 젊은 청년들이 서로 기도하는 것을 아시고<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 </span>본 교회 교인 가운데서 반주자와 교역자 가정이 함께 합세하게 된 것이다<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 </span>학생들이 모이던 교회를 도우러 가신 목사님 교회는 온 라인 예배를 드려 왔었기 때문에<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 </span>두 분 목사님 가정만 학생들이 모이는 교회와 함께 <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10-11</span>월을 지내기로 하였다고 한다<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 </span>그래서 함께 드린 예배실황을 온 라인으로 하여 동시에 중계하는 것이었다<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span></p> <p>   설교를 부탁하신 목사님께서 설교를 할 때에 꼭 마스크를 쓰고 하여야 한다고 하셨다<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 </span>그리고 온 라인 예배이기 때문에 설교 시간을 <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30</span>분 이전에 끝내 주시면 좋겠다고 하셨다<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 </span>그런 부탁을 받고나서 수락했지만<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 </span>난생 처음으로 마스크를 쓰고 설교를 한다는 것이 참으로 어색하게 느껴졌다<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 </span>자유롭게 해도 분명한 발음과 감정을 표현하기가 힘든데<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 </span>마스크를 쓰면 호흡이 자유롭지 못하고 작은 소리나 말끝이 흐려질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span></p> <p>   설교시간 이전에 성찬식이 있었다<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 </span>나는 성찬에서 빵을 자른 것이나<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 </span>쌀로 된 과자를 쟁반에 놓고 집도록 진행되었고<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 </span>작은 잔에 포도즙을 담아서 집례자들이 들고 있으면 자나가면서 빵과 잔을 들고 들어가서 묵상하고 있으면 집례자가 대표 기도를 한 후에 함께 드는 방법으로 진행되는 것에 익숙해 있었다<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 </span>그런데 성찬 준비가 된 작은 쟁반을 보니 봉인된 작은 프라스틱 잔만 있고 빵이나 쌀 비스켙 같은 것은 없었다<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 </span>집례하시는 목사님께서 성찬에 대하여 잠시 말씀을 하신 후에 한 사람 한 사람씩 충분한 거리를 두고 나와서 프라스틱 잔을 가지고 자기 자리로 돌아가라고 하셨다<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 </span>내 차례가 되어서 잔을 들고 들어와 앉았다<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span></p> <p>   기도를 드린 목사님께서 프라스틱 잔 위에 봉인된 비닐 한 겹을 벗기면 성찬용 비스켓이 나오다고 설명하셔서 조심해서 뜯어보니<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 </span>어른의 엄지손가락의 손톱만한 쌀 비스켙이 나왔다<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 </span>그것을 입에 넣은 후에<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 </span>또 다른 비닐 껍질을 벗기니 아주 소량의 포도즙이 들어 있었다<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 </span>포도즙은 겨우 입술 정도 축이어 주는 소량이었다<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 </span>아마도 <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COVISD-19 </span>사태로 인하여 개발된 신형 성찬식 킷트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 </span>정말로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성찬식을 경험했다<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span></p> <p>   프라스틱으로 만든 간이 설교단에서 말씀을 증거하게 되었는데<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 </span>내게는 조금 높아서 원고를 보기가 불편한데다가 온라인 생중계로 인하여 마이크 설치 위치가 조금 불편했다<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 </span>그렇더라도<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 </span>준비한 말씀을 최선을 다해서 선포했지만<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 </span>모인 교인들에게 내용이 잘 전달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 </span>마스크를 쓰고서 짧은 시간이 아닌 <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30 </span>여분을 혼신을 다해서 증거하고 나니<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 </span>지금까지 설교를 한 후에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탈진 상태를 느꼈다<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 </span>산소 공급이 부족해서인지 머리도 맑지 않았다<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 </span>이것 또한 나의 목회 사역에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설교 사역이었다<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span></p> <p>   일반적으로 한인 이민 교회는 예배가 끝나면 식사를 한다<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 </span>그러나 <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COVISD-19 </span>사태로 인하여 이런 관습도 바뀌었음을 보았다<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 </span>내가 어제 받은 점심 봉투에는 김밥 한 덩어리와 한국제 천연 사이다<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 </span>작은 탠저린 두 개와 작은 과자 봉지 두 개 그리고 군고구마 하나가 들어 있었다<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 </span>그 봉투를 받아서 함께 앉아 먹지 않고<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 </span>서로 멀리서 인사를 나눈 뒤에 집에 가지고 가서 먹는다는 것이다<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 COVISD-19 </span>사태로 인한 사회적 거리 두기가 오래 지켜오던 교회 예배와 예배 후의 교제를 나누는 것이 변한 것에서<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 </span>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것을 경험하게 한 것이다<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span></p> <p>   하나님께서 부족한 나로 하여금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성찬 예식과 예배와 교제의 시간을 경험하게 하신 것에 대하여 감사한다<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 </span>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나로 하여금 목사님이 안 계신 상황에서도 예배를 계속한 청년들을 만난 것에 대하여 또한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 </span>참으로 값진 만남이었다<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 </span>서로 인사를 나누다 보니 그 가운데에 <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3</span>명은 그 도시에 있던 대학교에 다니다가<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 </span>내가 사는 도시에 있는 대학교로 전학을 했다고 한다<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 </span>그러나 지금도 전에 나오던 교회를 참석한다는 것이다<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 </span>그래서 <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3</span>명의 학생이 예배를 드리려고 <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60</span>이나 멀리 떨어진 교회까지 온 것이다<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 </span>그 학생들이 다니는 대학교는 내가 미국에 온지 얼마 안 되었을 때에 한인 학생들이 주축이 된 기독학생회를 조직하고 정기적으로 말씀을 전하러 갔던 그 대학교이다<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 </span>벌써 <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37</span>년 전 일이다<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span></p> <p>   내가 사는 노인 아파트에서 <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10 </span>마일 안팎에 사는 학생들이기에 이번 <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COVISD-19 </span>사태가 수그러들면<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 </span>함께 만나서 신앙의 교제도 하고 식사도 대접하고 싶어서 내 전화번호를 학생에게 남기고 집으로 돌아왔다<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 </span>사실 나는 이 곳의 젊은 청년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 </span>젊은 선교회를 조직해서<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1990-1998</span>년까지 운영했었다<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 </span>그 이후에 교회를 중심해서 복음은 전하느라<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 </span>직접적인 청년 운동을 하지 못한 채 교회에 나오는 청년들을 양육했다<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 </span>그러나 목회에서 은퇴한 이후에 다시 청년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여러 번 시도를 했다<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 1990</span>년대의 이 곳 청년들의 상태와 지금의 상태는 여러 면에서 달랐다<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 </span>영적인 갈급함이 없다<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 </span>하나님의 말씀 공부와 영적 성장에 대한 관심이 참으로 적다<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 </span>아마도 지난 십 수 년 동안에 생활이 부유해진 결과에서인지 삶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하는 청년들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span></p> <p>   그런데 <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11</span>월 <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1</span>일 <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span>주일에<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 </span>만난 산호세에서 올라온 청년들은 내게 매우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 </span>그들이 깨끗하게 차려 입고 교회를 향해서 떠난 시간은 적어도 오전 <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9</span>시 <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40</span>분 정도는 되었으리라<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 </span>대화하는 태도가 진지하고 밝고 힘찬 청년들을 만난 기쁨에 오후가 참으로 즐거웠다<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 </span>집에 오자마자 아내에게 <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span>여보<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 </span>내가 오늘 한국에서 양육했던 젊은 선교회 형제와 자매들 같은 청년들을 만났어요<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 </span>라고 말했다<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 </span>내 전화번호를 받아 갔으니 금명간 전화로라도 연결되면<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 </span>주님의 말씀 안에서 교제 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span></p> <p>                                                                                                                                                                <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2020. 11.08</span><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span></p>네이튼 헤일(Nathan Hale /1755.6,6-1776.9.22)http://paulleemoksa.com/bbs/pid/133/detail/id/10687<br>네이튼 헤일(Nathan Hale /1755.6,6-1776.9.22)<br /> <br /> 어제(7월 6일) 오후에, 코로나 사태로 인하여 모이기는 힘든 때이지만, 그래도 독립 기념일이니 어느 교회에서나 단체에서 실내에서라도 기념음악회 모임을 가진 곳이 있을 것 같아서 찾아보았다.              <br /> 미국은 각 주가 모여 합중국이 된 나라이기 때문에 각 주의 사정에 따라서 방역 제한이 다르다. 내가 찾아 본  기념 음악회는 어느 주에서 모였는지 모르지만, 합창단원들과 관현악단 단원들은 마스크를 쓰지 않았다.<br /> <br /> 이 모임은 2020년 6월 26일에 Temple Square 라는 곳에서  The Tabernacle Choir 가 주관한 것이다. 독립 기념일에 늘 부르는 God Bless America, This Land is Your Land 등의 익숙한 곡들이 연주 되었다. 합창단원은 남녀 200여 명씩 되어 400여 명이 남녀가 반반으로 나누어 제복을 단정히 차려입고 섰다. 그 앞에는 관현악단 대원 백 여 명이 자리를 잡았다. 합창 단원들은 40 대 중반에서 60대 정도 되는 분들이었다. 참으로 잘 준비된 기념 음악회였다. 모임 중간에 한 분이 나와서 독립 전쟁 당시 21살에 장엄하게 교수대에 달려 죽은  네이튼 헤일에 대하여 이야기 했다. 그는 수 많은 적군을 죽인 사람이 아니다. 젊은 나이에 적군에게 잡히여 한 마디의 말을 남기고 떠난 청년이다. 그런데 왜 이 분을 미국 사람들은 그렇게 존경할까?<br /> <br /> 미국이라는 나라가 탄생하는데는 역사에 이름이 남아 있는 사람들도 있지만, 사실 무명의 용사들이 수 없이 더 많을 것이다. 학자들의 추산으로 독립전쟁에서 죽은 군인과 민병대원들의 숫자가 약 오만 명이 될 것으로 추산한다. 그 가운데는 전염병으로 죽거나 영양실조로 죽은 군인들도 포함 되었다. 잘 무장되고 훈련된 영국군인들과 맞서서 싸운다는 것은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처럼 무모해 보였지만, 결국은 값진 승리를 이룬 전쟁이었다.<br /> <br /> 전쟁을 치루고 있던 당시 미국의 국내 형편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 많았을 것이다. 자원의 부족과 훈련된 병사의 부족은 심각했을 것이다. 게다가 더욱 딱한 사정은 영국과의 독립전쟁 당시 미국에서는 전염병인 천연두가 창궐하여 13만 명이나 죽었다고 한다. 오늘 날 COVID-19  사태를 당하여 미국이 힘들어 하는 것처럼, 그 당시 미국 전체 인구와 비교한다면 사망자의 비율은 참으로 참담한 수치가 임에는 틀림이 없으리라. 그러한 상황에서도 독립을 위해 전쟁을 수행했고 결국 이루어냈다!<br /> <br /> 그 때나 지금이나 전쟁에서는 정확한 첩보가 있어야 한다. 조지 워싱톤 장군은 진격해 오는 적군의 동태 파악을 위하여, 적군의 후방으로 가서 탐지할 스파이를 모집했다. 그러나 그 일을 자원하는 사람이 없던 차에 한 청년이 장군을 찾아와서 자기가 그 일을 하겠다고 하였다. 그 젊은이가 바로 네이튼 헤일이라는 사람이다.<br /> <br /> 네이튼 헤일은 1768년 15살의 나이에 예일 대학에 입학했다. 그리고 18살에 학급 수석으로 졸업하고 New London 이라는 곳에 가서 교사로 일하고 있다가 군대에 입대하였다. 그가 정보를 수집하기 위하여서 그가 교사로 있던 그 동네로 잠입하여 영국군의 동태와 이동 경로등을 수집하다가 그가 파견 된지 일 주일 만에 롱 아일랜드에서 영국군에 붙잡혔다.<br /> 그는 죽기 전날 밤에 영국군에서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넣어 달라고 했지만 거절 당했다. 그 후에 그는 목사님을 만날 수 있도록 부탁을 했어도 또 거절 당했다. 그는 하나님께로 갈 준비를 차분히 하고자 했을 것이지만, 영국군은 그의 마지막 부탁들을 다 거절하였다.<br /> <br /> 그가 죽기 전에 영국군 장교가 할 말이 있는가를 묻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한다. 네이튼 헤일이 남긴 이 말은 형을 집행했던 영국군 장교의 일기에 기록되었다고 한다. 네이튼 헤일은 장교에게 “I only regret that I have but one life to lose for my country!” (나는 단지 내가 살아서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다!” 라고 말한 후에 형장의 이슬이 되었다.<br /> <br /> 이상의 사실을 요약한 설명이 끝나자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가 “피난처 있으니”(구 찬송가 79장)이 연주 되었다. 정말로 눈물 겨운 역사적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코케티컷 주에도 뉴욕 주에도 그 외의 몇 곳에 네이튼 헤일의 동상이 서있다고 한다. 1920년에는 네이튼 헤일을 기념하는 우표를 미국 우정국에서 펴냈다고 한다. 그리고 1985년 9월에 코네티컷 주는 네이튼 헤일을 코네티컷 주의 영웅으로 추대하였다.<br /> <br /> 내가 약 28년 전에 예일 대학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 학교와 관계된 분들의 동상들을 보았지만, 그 당시 나는 예일 출신이요, 미국의 대 각성 운동에 크게 쓰임 받았던 조나단 에드워드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가졌었기 때문에 네이튼 헤일의 동상을 보았어도, 잘 알아보려고 하지 않고, 이름 정도나 읽고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그러나 그 학교를 방문한지 많은 세월이 지났어도 뚜렸히 기억하는 것은 학생들이 많이 다니는 곳(지금 기억으로는 졸업식 전야에 갖는 행사를 하던 대 강당) 광장에 큰 돌판들에 가득히 적은 글자로 새겨진 이름들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br /> <br /> 그것은 예일 대학교 재학중에 또는 졸업생들 가운데 세계 제 1차 대전과 제 2차 대전에서 전사한 분들의 이름들이다. 그 학교 출신이, 나라를 위해서 앞으로 귀한 일을 할 젊은 인재들이…, 꽃을 피워보지도 못하고 장열하게 전사 할 수 있었음에는 네이튼 헤일의 동상 앞을 지나가면서 애국의 충정을 마음에 새긴 학생들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본다.<br /> <br /> 스물 한 살의 젊은 나이에 죽은 네이튼 헤일은 오늘도 수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남아 기억되는 젊은이임에 틀림이 없다. 미국 독립 기념 음악회의 마지막 곡은 구 찬송가 524장 ‘우리다시 만날 때까지’를 부르며 막을 내렸다.<br />                                                                                                           <br /> <br />                                                                                                                                                              (2020.07.08)<br />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미국 독립 기념일’ 풍경http://paulleemoksa.com/bbs/pid/133/detail/id/10686<br>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미국 독립 기념일’ 풍경<br /> <br /> 금년 7월 4일은 미국 독립 244 주년이 되는 날이다. 그러나 금년의 독립 기념일은 아마도 미국 역사상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분위기’에서 지낸 아쉬운 날로 기록 될 것이라고 생각된다.<br /> <br /> 금년에는 성대하게 치뤄지는 기념 퍼레이드가 없었다. 온 가족이 성조기를 들고 나와서 도로에 행진하는 군인들과 민간인들 그리고 자동차들 향하여 환호하는 기쁨에 찬 활기찬 분위기를 볼 수 없었다. 구름처럼 몰려든 해변가의 인파도 주 정부의 비치 폐쇠령 때문에 그 넓은 주차 공간과 펼쳐진 백사장이 한가롭기만 하였다. 하늘을 가르는 축하 비행기 쇼의 굉음도 들을 수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독립기념일 행사의 꽃이라고 하는 밤 하늘을 수 놓는 화려한 불꽃놀이도 미국 전역에서 80% 이상이 취소되었다고 한다.<br /> <br /> 내가 가는 산타 크라라 카운티에서는 남쪽에 있는 길로이라는 시가 유일하게 불꽃 놀이를 간략 하게 하였다. 사람들이 모여서 볼 수는 없고, 각자가 집에서 하늘을 보며 구경하라는 것이었다. 참으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독립 기념일’ 풍경이었다. 수 많은 사람이 모여서 구경하는 ‘핫 도그 먹기 대회’는 관객 없이 치뤄졌고, 독립 기념일을 맞아서 가져왔던 각종 운동 경기며, 자동차 경주 대회도 없었다.<br /> <br /> 독립 기념일을 맞이하여 대통령의 짧막한 연설과 알링톤 국립 묘지의 헌화가 TV에 잠시 방영되는 정도였다. COVID-19의 확진자의 급격한 증가로 인한 결과가 이렇게 독립 기념일을 지킬 수 밖게 없도록 한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울뿐이다.<br /> <br /> 그래도 다른 한 편으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감동적인 스토리를 미국 주요 방송들에서 전해 주었다. 독립 기념일을 맞이하여 이웃에게 마스크를 나누어 주는 사람들, 2,000 여명의 사람들에게 무료 급식과 선물을 전달 하기 위하여 땀흐려 일한 사람들 등의 선행으로 이웃을 섬기는 사람들이 있음을 보여 주었을 때에 큰 감동을 받았다.<br /> <br /> 가장 잊을 수 없는 장면은 남자 학생 형제가 정원에서 풀을 깎는 장면이었다. 그들이 깍는 주택 앞의 풀밭은 자기 집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집이다. 그 형제는 코로나 바리러스 사태 때문에 힘들어 하는 동네에 사시는 노인들과 건강이 좋지 않은 그 외에 다른 사정이 있는 집들을 골라서 풀을 깎아주고 있다는 것이다!              <br /> <br /> 각종  자원 봉사 운동이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힘들어 하는 사람들에게 큰 격려와 감동을 주고 있다. 아나운서의 말에 의하면 미국의 각 주마다 이런저런 형태의 이웃 돌보기가 계속 일어나고 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해 주었다. 어떤 사람은 시간을 내어서 다른 주 까지 여러 시간 자동차를 몰고 가서 봉사하는 일에 힘을 모으고 있는 동영상을 보여주기도 했다. 참으로 그런 분들로 인하여  마음이 가슴을 뜨거웠다.<br /> <br /> 매 년 독립 기념일에는 워싱톤 D.C 에서 성대한 기념 음악회가 있었다. 그러나 금년은 그런 행사를 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라서 취소한 것 같다. 그래서 지난 해에 한 행사를 찾다가 미국 웨스트 포인트 육군 사관학교에서 가졌던 행사를 YOU TUBE 로 보았다.<br /> <br /> 학교 교정에서 모인 이 축하 음악회에는, 합창단을 위하여 단을 만들고 단의 뒤에는 반달 같은 모양으로 하여 합창단이 부르는 음이 앞 방향으로 퍼지도록 디자인 된 간이 벽을 쳤다. 바로 옆에 허드슨 강이 흐르므로  바람이 부는 지형이기 때문에 음향 조절에 신경을 많이 쓴 것 같다. 연단에는 남자와 여자 각각 2백 여명 정도가 반씩 나누어서 남자는 남자대로, 여자는 여자대로 유니폼을 단정하게 입고 서 있었다. 합창 단원들의 연령은 40대 중반으로 부터 50대 중반으로 보였다.<br /> <br /> 합창대 앞에는 약 백 여명이 되는 남녀 관현악단이 앉아 있었다. 앞에는 민간인 연주자들이 뒤에는 군악대에 속한 분들이 앉아서 정교하고 힘차게 연주를 했다. 지휘는 민간인과 군인 지휘가가 맡은 곡들을 지휘하였다.<br /> 관현악대 앞에는 육군 사관학교 전교생들이 의자에 단정히 앉아서 행사에 참가하고 있었고, 그 뒤에 일반인 석이 마련되어 있었다. God Bless America, Battle Hymn of the Republic 를 비롯하여 해안 경비대와    각 군 군가와 애국적인 노래들을 모두 외워서 불려 우렁차게 울려 퍼지는 웅장한 축하 음악회였다.<br /> <br /> 연주회 중간 쯤에 한 남자분이 나와서 독립 기념일 축하와 함께 지금 연주회를 하고 있는 그 장소에서 일어난 독립 전쟁 당시의 잊지 못할 사건을 소개해 주었다. 그 곳이 바로 영국과의 독립 전쟁에서 한 획을 그은 역사적인 장소라는 말과 함께 다음과 같은 일화를 소개했다. 육군 사관학교 구내에 있는 약 2-3 피드가 되는 체인으로 연결된 설치물에 관한 것이었다.<br /> <br /> 남북 전쟁 당시 조지 워싱톤 장군은 무적의 영국 해군 함대가 허드슨 강을 타고  들어 올 것을 예견하였다고 한다. 그 배에는 많은 병력과 군수 물자가 실려져 있었을 것이다. 전세를 뒤집기 위해서는 꼭 그 함대를 저지해야만 하기 때문에 어떤 묘수를 찾아야 했다. 조지 워싱턴 장군과 참모들이 의논한 끝에 얻은 결론은 강물 밑에 보이지 않게 쇠로 만든 튼튼한 체인을 만들어서 배 밑창이 결려 좌초하도록 하는 것이다.<br /> <br /> 마침 수 마일 떨어진 곳에 제철 소가 있어서 작업이 시작 되었다. 이 일은 분초를 다투는 중요한 일이었다. 체인은 하나 하나가 2-3 인치 두께로 크기는 2-3 피트로 견고하게 만들어서 이었다. 웨스트 포인트와 건너편 언덕에 고정 시키려면 길이가 약 160 미터 정도가 되어야만 했다. 이 힘든 작업을 6 주 안에 끝냈는데, 그 무게는 무려 65톤 정도나 되었다고 한다. 어떻게 그것을 조립했으며, 어떻게 강에 설치했는지… . 가히 그 당시로서는 상상을 초월한 일을 해낸 것이다.<br /> <br /> 이 일은 오직 미국이 영국으로 부터 독립을 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온 국민이 일치 단결하였고, 군인은 군인으로써, 민병대는 민병대들로써, 그리고 낮 밤 없이 용광로에 쇠를 넣도 끌여 망치로 두두리며, 힘겨웁게 무거운 각 고리들의 형태를 잡기 위하여 땀을 비오듯이 흘리며 일한 역사에 이름 한 자 남기지 않는 철공소 직원들의 애국심의 결집이 미국을 독립하게 하는 밑거름이었음을 보았다.<br /> <br /> 지금 사관 학교 내에는 독립전쟁 당시에 영국군을 저지했던 그 체인의 일부가 서로 엮여서 담장처럼 만들어져서 전시 되어 있는 것을 영상으로 보여 주었다. 그러니까, 고리들은 245년 전에 미국을 위해서 생명을 걸고 일했던 분들의 넋이 긷들어 있는 것이다. 그 설치물을 보는 나의 마음은 숙연해졌다.<br /> <br /> 약 25여년 전에 내가 속한 교단의 목사 회의가 뉴 저지에서 모였다. 그 때에 미국 육군에서 근무하셨던 목사님이 계셔서 학교와 협의하여 모인 목사들이 단체로 웨스트 포인트 육군 사관학교를 견학했다. 시간 상 오래 머물지는 못하고 사관학교 교회당을 방문해서 사관학교를 빛낸 위대한 장군들이 생도일 때에 앉았던 자리나, 그들 가운데서 성가대원으로 봉사했던 분들이 섯던 곳들을 알려 주어서 보았다.<br /> <br /> 미국은 역사를 잘 보존하는 나라이기 때문인지, 세계적인 사관학교의 교회로는 이해가 가지 않을 만큼 소박한 옛날 건물과 내부 시설이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처음 교회당을 지은 그대인 것 같았다. 의자도 나무로 만든 것이었고, 바닥도 그 당시 시멘트로 만든 바닥 그대로였다.<br /> <br /> 육군 사관 학교가 재정이 없어서 교회당을 그대로 보존하는 것일까? 교회당을 새로 지어줄 독지가를 아직 찾지 못해서일까? 아닐 것이다! 미국의 독립과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생명을 바쳤던 선배들이 앉았던 그 자리에 앉은 생도들은 무언의 교육을 받았을 것이다. 주님을 믿고 의지하며 삶을 조국을 위하여 드렸던 숭고한 정신을 계승해 나가겠다는 다짐과 결단이 교목의 설교 못지않게 그들에게 감명을 주었을 것이다. “나도 이런 분들과 같은 정병이 되어 자랑스런 군인이 되리라!” 하고 수 없이 다짐하지 않았을까.<br /> <br /> 금년에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독립기념일’을 지냈지만, 머지 않은 훗 날에 다시 한 번 미국의 생일인 독립 기념일 행사가 성대하게 열릴 것을 기대한다.<br />  <br />                                                                                                                                                           (2020.07.07)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 (4)http://paulleemoksa.com/bbs/pid/133/detail/id/10607<br>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 (4)<br /> <br />      오늘 아침 뉴스를 보기 위해서 TV 를 켰더니, 이곳 북가주에 있는 어느 병원의 의사가 뉴욕에 가서 코로나 바이러스 확진자을을 치료하고, 복귀해서 본래 근무했던 병원으로 출근하는 영상을 보여 주었다. 병원에 도착하자 동료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직원들이 밖에 나와서 줄(사회적 거리 두기 관계로 띠엄띠엄 서서)을 서서 큰 박수를 치며 반갑게 영접하는 장면이 참으로 인상적이었다.<br />     <br />      그 의사는 뉴욕 주가 미국 전역에서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자와 사망자가 급겨히 증가하자, 자원하여 뉴욕에 있는 병원으로 가서 치료하기를 원했고, 병원도 허락해서 약 두 달 정도 땀흘려 수고하고 돌아온 것이다. 이제는 이곳 북가주도 6만 오천 명정도의 확진자와 2천 7백명 이상의 사망자가 있으니, 이곳에서도 E.R 닥터들이 전방에서 열심히 치료하느라고 일손이 딸리니 다시 복귀한 것이 아닌가 한다.<br />    <br />     이어서 나온 영상은 비행기 좌석 가득차게 앉아 있는 승객들에 대한 것이었다. 이 영상을 소개하는 아나운서는 이곳 캘리포니아 지역에서 자원하여 뉴욕으로 가서 코로나 바이러스 퇴치를 위하여 위험을 감수하고 자원하여 가서 땀과 눈물을 흘리면서 수고했던 자원 봉사 의료원들이 비행기로 귀가 하기 위하여 앉아 있는 것이다. 모든 승객이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는데, 그 분들은 ‘사회적 거리두기’로 앉아 있는 것이 아니었다. 모든 좌석이 빼곡하게 차 있었다. 하기야 비행기 안에 약 2 미터 정도씩 앉으면, 거의 빈 비행기로 대륙을 횡단할 수 밖에 없으니, 정부의 의료진들과 의논해서 결정한 일이 것이다.<br />     <br />     앉아 있는 승객들의 얼굴은 참으로 밝았다. 그 힘든 생사를 다투는 환자들을 돌본 분들 같지 않게 생기가 넘쳤다. 물로 집으로 돌아와 정든 가족들을 만나는 기대가 있어서이기도 하겠지만, 그들의 건전한 삶의 동기와 가치들, 즉 위기를 당한 사람들을 섬기는 강한 사명감이 있는 분들이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또한 감사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이 분들의 모든 항공료는 무료였다는 것이다. 이 분들의 귀가를 위하여 United Air Line 회사에서 제공한 것이라고 한다. ‘사회적 하나 됨’을 위한 사랑의 배여였다. 의료진은 자신의 시간과 생명을 위험을 무릎쓰고 적극적으로 나누었고, 직접 환자를 돕지는 않았지만 수고 한 분들에 대한 배려를 아끼지 않은 항공사가 베푼 사랑은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황폐해져가는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는 사건이 아닌가 한다.<br />    <br />     내가 사는 실리콘 밸리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도시에 이색적인 생일 축하가 있었다. 만 백 세가 되신 할머니의 생일인데, 세계 제 2차 대전에 해군에 근무하셨던 분이시다. 현재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로 인하여, 100세 생일 잔치를 위하여 사람들을 초대 할 수 없으므로 부득불 취소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자 지인들과 도시 사람들이 이 잔치를 다른 방법으로 해서, 그 할머니의 생신을 의미 있게 치뤄드렸다.<br />    <br />     할머니가 집 앞 뜰 그늘에 앉아 계시게 하고는 진지들과 도시 사람들이 자동차에 생일 축하 인사판과 풍선들 장식하고는 손을 흔들며 큰 소리로 축하를 전하면서 천천히 지나가는 것이었다. 만면의 웃음을 띄고 손을 흔드시며 기뻐하시는 할머님의 모습이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젊은 시절 국가를 위하여 자원하여 군 복무를 마치셨고, 머지 않는 언제인가는 이 땅을 떠나실 할머님에 대한 존경과 배려의 마음은 실로 한 할 머니의 자랑스런 삶을 기리는 인상적인 사건이었다. 사람들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코로나 바이러스를 이겨나가는 건강한 인간 관계의 강인한 연결 고리를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계기였다.<br />     <br />     이번 코로나 사태가 아무리 ‘사회적 거리두기’로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갈라 놓았다고 하여도, 사랑하는 연인 사이는 떼어놓지 못하고 있음을 보았다. 지금 미국에서는 교회도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니, 대부분의 결혼식을 교회에서 드리는 것이 상례이기 때문에, 결혼을 약속하고 결혼식을 올리지 못하는 젊은 연인들이 수 없이 많이 있을 것이다. TV에 소개한 일상의 삶에서는 볼 수 없는 진기한 결혼식 모습을 방영해 주었다. 도로변 보도에 신혼 부부가 서 있고 그 주위에 띠엄띠엄 사람들이 서 있는데, 그 분들이 축하객인지 지나가던 사람인지는 모르겠다. 신혼 부부가 주로 주시하고 있는 곳은 앞의 아파드로 보이는 건물이었다. 둘이 결혼 예복을 입고 그 건물을 향하여 손을 흔들고, 그 건물에 사는 주민들이 발코니에 나와서 손을 흔들면서 축하해 주는 멋진 모습을 보여주었다. 비로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면서 축하를 했어도, 한 가정을 이루기를 원했던 두 연인의 마음으로 인하여, 삶은 계속 되어가는 것이며, ‘사회적 거리두기’ 를 넘어선 인간 연대의 관계는 결코 끊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보았다.<br />     <br />     여러 주에서 조금씩 사업장들의 열 수 있도록 허가를 내주고 있다. 텍사스 주는 이용업을 허락해 주었다. 그곳에서는 머리를 깍는 사람이나 잘라주는 사람이나 마스크를 쓰고 있는 것이다. 많이 불편하겠지만 장기간 이발을 하지 못한 채 집에 덥수룩한 머리를 극적이고 집에 있었으니, 이발소로 즉시 달려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간단하 허락이 실로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일상의 삶’이 얼마나 행복했던가를 되 짚어 볼 수 있는 계기가 아닐 수 없다.<br />      <br />     나는 ‘사회적 거리두기’를 시행하라는 지시가 내려오기 직전에 이발을 하였다. 대부분 월 초에 이발을 한다. 그러나 이번 사태 발표후, 두 달이 넘으니 뒷 머리가 길어지고 머리가 근질근질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만일에 사태에 이발을 하려고 사두었던 이발기를 사용하여 머리를 깎을 마음이 생겼다. 요즈음 영상 광고에 혼자 머리를 쉽게 깍는 것을 보여주는 것들이 있어서, 혹시 혼자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혼자 시도를 해보았다. 그러나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뒷 부분만 어떻께 깎아 보겠다고 시도했지만, 예상과는 매우 달랐다. 처음인데다가 뒤가 보이지 않으니 짐작으로 대충하니 그 모습이 가히 상상이 가는 것이다. 그래서 집사람의 큰 손 거울을 빌려서 뒤 모습을 보니 정말로 가관이었다.<br /> <br />      할 수 없이 집사람의 손을 빌릴 수 밖에 없어서 부탁을 했더니. 망설였다. 쥐가 뜻어 먹은 것 같은 머리를 다듬고자 가위를 사용하고자 했으니, 집에서 쓰는 가위인지라 잘 잘라지지도 않을 뿐아니라 어찌할 방도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내가 쓰던 이발기계를 사용하게 되었다. 집사람이 조심스럽게 해 보려고 했지만 머리에 대고 밀고 올라가다가 자칫 잘못하여 정리는 커녕 한 두어군데에서 망쳐버렸다. 그냥 이발기를 위로 치밀어 올려서 위에 좀 길게 놓아두어야 할 곳을 깊이 밀어버린 것이다. 또한 머리 뒷쪽의 머리를 차차로 치켜 올린 부분과 좀 길게 남아 있어야 할 부분의 경계선도 물결을 치는 것이었다. 더 이상 진전하다가는 머리 전체가 폭탄 맞은 것 같을 것 같아서 중지시켰다.<br /> <br />      이렇게 머리를 망친 그 다음 날, 집사람이 혈액 검사 예약이 있어서, 부득불 외출을 해야 하니 난감했다. 그래서 모자를 쓰면 어떨까 하여서 모자를 써 보니. 모자를 써도 기대한 만큼 가려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용감하기 모자를 쓰지 않고, 집사람과 함께 갔고, 집사람의 채혈 순서를 기다리는 대기 시간과 채혈하는 시간에 볼만한 뒷통수를 노출한 채로 앉아 있었다. ‘사회적 거리두기’ 때문에 거리를 둔 의자에 태연히 앉아 있다가 나왔다. 지금은 머리를 깎은지 약 열흘이 넘어서 머리가 조금 자라서 처음보다는 사뭇 좋아졌다.<br /> <br />      매년 5월 첫째 목요일은 미국의 ‘국가 기도일’ 이다. 국가 기도일은 트루만 대통령 때 부터 있었는데, 레건 대통령 때에 매년 오월 첫째 목요일로 고정하여 시행하고 있다.  참석한 분들은 약 2 미터 정도씩 거리를 둔 의자에 앉아서 진행되었다. 먼저 트럼프 대통령이 인사를 한 후에 영부인의 간단한 기도로 이어졌다.  그 이후에 순서는 종교 지도자들의 리레이식 기도나 성경을 중심으로한 기원문을 읽는 분들도 있었다. 특이한 것은 코로나 사태로 인하여 노스 캐로나이나에 살던 자녀들을 둔 한 간호사가 뉴욕 지역의 긴급한 상황을 듣고 자원하여 수고한 한 40대쯤 되어 보이는 여성의 말도 있었다. 요약하면 자기가 어떤 선행을 한 것이 아니라, 마땅히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는 것이다. 쉽게 할 수 있는 말이지만, 참으로 마음에 깊이 와 닿는 말이 아닌가. 마땅히 하여야 할 사람의 도리를 회피하고 싶고, 다른 사람이 하겠지 하는 마음으로 살기 얼마나 편한 시대인가? 내게 왜 안하느냐고 물을 사람도 없고, 남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는 개인주의가 판치는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이 생사를 가르는 위험한 장소로 자녀들을 둔 어머니로서, 혼쾌히 떠나는 것이 쉽다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좋은 생각을 하는 사람은 많아도 그것을 실제로 실천하면서 사는 사람은 많지 않다.<br /> <br />      나는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로 인하여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느니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분들을 통하여 많은 감동을 받고 있다. 그런 분들 가운데서 실제로 자신이 감염되기도 하고 세상을 떠난 분들도 있다고 한다. ‘사회적 거리 두기’ 가 아닌, ‘사랑 안에서 하나 됨’을 실천한 분들을 심히 존경한다. 국가 기도일을 통하여 ‘하나님과 인간의 거리두기’ 를 넘어서 ‘하나님과 인간이 가까워지기’ 를 원하여 백악관에 모인 분들을 보면서 크게 감사한 마음을 가졌다.<br />  <br />                                                                                                                                                                           (2020.05.11)<br />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3)http://paulleemoksa.com/bbs/pid/133/detail/id/10601<br>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3)<br /> <br />    4월 20일 아침부터 콤퓨터 앞에서 일을 하다가 잠시 휴식을 취할 겸해서 TV를 켰다. 나타난 영상은 뉴솜 캘리포니아 주지사가 이곳 실리콘 밸리의 한 모텔 앞 주차장에서 연설을 하는 것이었다. 내용은 코로나 바이러스의 퇴치를 위하여 주와 지방 정부들이 더 나아가서 연방정부의 재난지원국까지 힘을 모으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가 특별히 다룬 사항은 집없이 방황하는 사람들(홈레스)에 대한 코로나바이러스 예방에 관한 것이었다. 주 지사와 각 시장 그리고 전문 담당자들 설명과 계획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br /> <br />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현재 캘리포니아 전역에 약 18만 여명의 홈레스들이 거리에서 고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설명하는 주 지사의 얼굴에 고생하면서 사는 분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서려 있는 것이 역력하게 보였다. 이 분들에 대한 대책을 이야기 하기 전에 그는 “우리가 사회 생활을 하면서 기억할 것은,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는 말이었다. 비록 그분들의 삶이 궁핍하고 구차해졌어도 그분들에 대하여. 우리가 월등하고 그들은 실패자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된 사람들이 우리 밑에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함께 힘을 모아 도와서 그들을 돕고 위기를 극복하자는 말을 하였다. 이 말을 듣는 나의 마음은 참으로 귀한 정치 지도자를 만난 기쁨과 그의 마음과 따뜻한 배려에 감동되어 뜨거워졌다.<br />    그는 이어서 말하기를 주 정부과 카운티들과 각 시가 힘을 모으고 그 위에 연방정부의 재난 지원원국(FEMA)이 힘을 모아서 홈리스들이 거주할 수 있도록 모텔의1,100개 객실을 임대했고, 앞으로는 매물로 나오는 모텔들을 구입해서 대대적으로 이런 분들을 지원할 계획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사실은 홈레스들을 돕기위한 여러 가지 계획들이 각 도시마다 있어 왔다. 그렇지만, 그들을 위한 간이 주택 건설이 시행되지 않은 것은, 도시의 어느 지역에 홈리스들을 위한 계획을 발표하면, 그 지역 주민들의 강한 반발에 부딛혀 왔기 때문에 실현되지 못했다.<br /> <br />    가장 인상적인 것은, 주 지사와 각 시장이 연설 할 때에 그 옆에서(사회적 거리 두기로 인하여 약 2 미터 정도 떨어져서, 마스크를 쓰고) 열심히 연설 내용을 수화로 통역을 해 주는 50대 중반의 신사가 있었다. 내 생각에는 주 지사까지 내려와서 연설을 하기 때문에, 전문 수화 통역사를 데리고 왔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주 지사 이후에, 산호세 시장이 연설을 하면서 “이웃 도시인 캠벨 시장과 저는 같은 생각을 가지고 힘을 모으고 있다.” 라고 하면서 수화 통역을 하는 분을 가리켰다. 그러니까 캠벨 시장이 자원해서 말을 못듣는 시청자들을 위하여 수화로 봉사한 것이다. 한 도시에 시장이 섬기는 종이 되어 수화로 통역해 주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br /> <br />     아침마다 코로나바이러스의 확진자와 사망자를 확인하고, 또한 일기예보를 보기 위하여 T.V 뉴스를 본다. 내가 사는 실리콘 밸리에서는 사회적 거리두기와 주민들의 협력으로, 확진자와 사망자가 급격히 늘지는 않고 있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그런데 반대로 급격하게 늘어가는 현상들이 있다. 캘리포니아 차량국의 보고에 의하면, 도로에 다니는 차량들은 아주 급격하게 줄었다고 한다. 나도 식료품이나 약을 가질러 갈 일이 있을 때에, 내가 운전을 해 보아도, 빼곡하게 줄지어 달리언 차량들은 오간 곳이 없고 드문드문 차들이 지나가는 기현상을 보곤 한다.<br /> <br />    그런데 믿어지지 않는 통계를 발표했다. 주행 차량들을 급격히 줄었지만, 과속으로 티켓을 받은 사람들은 급격히 늘었다는 것이다. 87% 나 늘었다니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이곳 도로의 상태는 매우 좋은 편이다. 다른 차량들도 없느니 도로의 제왕이나 된 것처럼 마음껏 페달을 밟고 기분을 내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집에서 오래 있다가 나와서 오래간만에 운전을 하니 기분이 상쾌해져서 한 번 마음껏 달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특별이 젊은 사람들에게는 이런 이유도 있을 것 같다.<br /> <br />    이번 세계를 강타한 코로나 바이러스의 영향으로 일어난 경제적인 손실은 말할 수 없이 큰 것 같다. 주가가 큰 폭으로 떨어진 이후에 조금 오르는 듯 하다가 다시 낮아지기를 반복하고 있다. 국제 유가의 급락 또한 심각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내가 사는 이 곳에 개론 당 $ 2.60 정도의 가격을 본지가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 각종 물품들이 큰 폭의 세일을 하고 있다는 광고도 나오고 있다. 실현 될지는 모르지만 일각에서는 자동차 운행이 아주 적어 졌기 때문에 자동차 사고로 인한 생해가 극도로 적어졌기 때문에 차 한 대당 $ 50.00 정도씩 보험료 환불 혜택이 있을 것이라는 말도 있다. 이런 가운데서 가장 걱정 되는 것은 미국에 약 2.600 만의 실업자가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 이후에 발생하였다는 것이다. 이 분들을 위하여 국가적으로, 사회적으로 돕는 운동들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지만, 이 사태가 장기화 될 경우에는 매우 걱정이 된다.<br /> <br />    이번 사태 이후로 네프렉스(NEFLEX)는 유료 시청자가 1,500 만명이 늘었다고 한다. 무료한 시간을 영화나 유흥 프로그람을 보는 사람이 급격히 증가했다는 것을 말한다. 우울증 환자와 가정 폭력 신고도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이런 일들을 예방하기 위하여 여러 단체에서 예방 프로그램을 운영하지만, 많은 사각 지대가 있을 것이다. 일 터가 없으니 생계가 걱정이 되고 게다가 자녀 양육비며 아파트 임대료 각종 보험등을 해결하는 일을 해결해야 하는 것이 무거운 짐일까. 참으로 안따운 일이 아닐 수 없다.<br /> <br />    미국의 각 주마다 사회적 거리두기에 대한 점차적 폐지를 검토하고 있다. 워낙 산업이 위축되어 생업에 지장이 있으니, 가능한 한 빠른 시일내에 폐지를 하고자 하는 마음은 위정자나 국민이나 한 가지일 것이다. 캘리포니아 주는 5월 3일에 일부를 해재한다고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그 이유는 다시 이 질병이 확산되면 더 큰 국가적 방역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연장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위스콘신 주에는 주 청사 앞에 수 많은 사람들이 모여 폐지하라는 구호를 외치고 있는 것이 방송 되기도 했다. 식당, 이발소, 미장원, 네일 살롱, 제과점, 피자 레스토랑, 수 만개의 맥다놀, 버거 킹, 커피 점, 소규모의 소매점 …… . 셀 수도 없는 업종들이 거의 문을 닫은 상태로 있다.<br /> <br />    그 가운데서도 학교가 휴교를 하였기 때문에, 학생들이 인터넷으로 집에서 수업을 받고 있다. 이렇게 되니 부부가 일해야 살아 갈 수 있는 가정에서는 누군가 성인 한 명이 남아야 한다. 부모 가운데서 한 사람이 재택 근무를 하는 경우에는 몰라도, 둘 다 밖으로 나가서 일해야 할 경우에는 한 사람이 직장을 쉬어야 하는 문제도 있다. 참으로 한 번도 살아보지 않은 힘든 시기를 살 수 밖에 없는 현실이다.<br /> <br />    금년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학생들이 참으로 안 됐다. 추억 많은 고등학교의 마지막 학기를 이런 상황에서 지내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도 기다리는 행사인 프럼 파티도 갖지 못하 확률이 크다. 일설에 의하면 8월 말 경에 졸업식을 할 것이라고 한다. 이번 사태가 재해임에는 틀림 없다. 그러나 이것은 인재이지 천재는 아니다. 먹지 말아야 할 것을 먹어서 동물의 바이러스가 인간의 몸에 숙주를 하도록 했든지, 생체실험을 해서 생화학 무기를 만들려다가 실수로 사람들에게 퍼져갔는지 아직도 규명할 부분이 많이 있을 것이다.<br /> <br />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사람들에 의하여 시작된 것이다. 그럴지라도, 만일 일 주일 이내에 세계에 이것이 전 세계로 확산 될 수 있는 위험한 질병임을 통보하고 발생지역을 봉쇄하고 차단 했다면 95%정도 확산을 막을 주 있었고, 두 주일 정도 후에라도 제대로 경고를 했다면 80%의 예방 성공이 가증했을 것이라고 질병 전문 학자들은 말한다. 이 질병의 발병 확인은 지난 해 12월 달이었다고 하는데, WHO에서 발표한 위험 전염병 경고는 3월 초순이었으니, 지난 몇 달 동안 전염병 보균자들이 세계 곳곳으로 여행이든지, 사업적인 목적으로 세계를 주름잡고 다니게 한 것이었다.<br />    그 결과 미국에서만 4만 여명 이상 세상을 떠난 것이다. 정말로 마음이 아프다.<br /> <br />                                                                                                                                                                            (2020.04.27)<br />  <br />  <br />  <br />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나라(2)http://paulleemoksa.com/bbs/pid/133/detail/id/10574<br>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나라(2)<br />  <br />    지난 월요일(3월 23일) 정제된 식수를 사러 나갔다. 일반적으로 오전 9시에 상점을 열기 때문에 개점 시간 조금 전에 도착했다. 그런데 먼저 온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릴 것이라는 예상이 빗나갔다. 왜 그럴까 하고 상점 문 앞에 가니 오전 10시로 개장 시간이 변경된 것이다. 그냥 그 자리에서 한 시간 이상을 기다리기가 지루할 것 같아서 주변의 마켓에 가서 생필품을 조금 샀다. 그래도 시간이 많이 남았다. 좀 더 기다리다가 물을 사가지고 갈까 하다가, 예상 시간에 집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걱정을 할 집사람이 생각났다. 그래서 전화를 하려고 찾아보았더니, 아니나 다를까 그날 아침 따라 전화기를 가지고 나오지 않은 것이 아닌가?<br />  <br />    할 수 없이 약 20여분 걸려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어제(27일) 다시 물병 8개를 가지고<br /> 오전 11시 경에 가니 10 여명이 물통을 들고 서 있었다.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사람간의 간격을 약 2 미터정도 떨어져야 하니 그 길이가 제법 길었다. 순서가 되어도 상점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종업원이 통을 가지고 들어가서 가지고 나올 때 까지 멀리 떨어져서 기다려야 했다.<br />  <br />    아침 뉴스 시간에 TV를 보니 참으로 진기한 아나운서 데스크를 보았다. 뉴스 진행 아나운서 남, 여 둘이 앉았는데, 뉴스 룸의 테불에 나란히 앉은 것이 아니라, 테불을 새로 만들었는지, 아니면 반을 잘랐는지, 반 토막이 된 것 같은 것이 되어 서로 떨어져서 뉴스를 진행하고 있었다. 한 아나운서가 말하기를 정부의 지시로 서로 6 피트 이상 떨어져서 있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을 했다. 또한 일기 예보나 교통 정보를 알리는 아나운서는 자기 집에서 방송을 진행하였다. 정말로 새로운 시대가 도래 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교통 정보를 알리는 아나운서가 산프란시스코의 교통상황을 알리면서 드론을 띄워서 번화가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아침 8시 뉴스 시간이니 보통 때라면 출근하는 사람들의 바쁜 발걸음이며, 도시에 꽉 찬 차량의 행렬이었을 터인데, 도시가 텅 비었다. 행인들도 없었다. 그 이유는 회사원들이 재택 근무를 하게 되었고, 상점을 열지 않으니 유령 도시 같이 된 것이다. 미국에서 교통난이 심한 산프란시스코로 들어오는 교량에는 간간히 톨게이트를 드나드는 몇 대의 차량들 밖에 없었다. 내가 사는 실리콘 밸리의 경전철도 목요일 자정(26일)을 기하여 운행이 중단되었다. 그 이유는 경전철 운행과 관계된 직원이 감염 확인이 되었는데, 그와 접촉한 직원들을 다 검사해야 하기 때문이 이라고 한다.<br />  <br />    트럼프 대통령께서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를 맞아서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한 때가 내 기억으로는 3월 초가 아닌가 한다. 그 이후 거주지에 머물기, 외국 여행 자제하기, 외국에 있는 미국국민 들어오게 하기, 생산 가공하는 라인들 이외에는 재택근무 하도록 하기 등 총력을 기울여 확산을 막고 있다. 한 전문가의 보고에 의하면, 만일에 방역에 실패하면 미국의 인구 70% 정도가 감염될 것이고 170여 만 명이 사망할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 총 없는 전쟁이다. [국가 비상사태]라는 말에 처음에는 의아해 하였지만, 지금은 왜 대통령이 이런 결정을 했는지 이해가 간다.<br />  <br />    어떤 전문가의 말에 의하면, 일기가 쾌청하고 온도가 높아져서 섭시 80 여도가 되면, 코로나바이러스의 확산이 수그러들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내가 살고 있는 실리콘 밸리의 날씨가 예년과 같지 않다. 이 곳의 지난 2월의 강우량은 지난 160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고 한다. 하기야 단 하루도 비가 오지 않았다. 그런데 왼 일일까? 3월 화창한 봄 날씨가 화사하게 펼쳐질 새 봄의 기온은 예년에 비하여 낮고, 게다가 이 달의 반 정도는 비가 오락가락하는 날들이었다. 이런 결과로 산에는 많은 눈이 쌓여서. 금년 여름에는 가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이 글을 쓰고 있는 3월 28 일도 절반은 비가 오고 반은 하늘에 구금이 잔뜩 낀 음산한 날씨이다. 거의 동부 뉴욕과 비슷한 온도이다. 일기 예보에 의하면 주일인 내일도 비가 내리고, 4월 1일에야 70도를 넘는 날씨에 맑은 하늘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br />  <br />    뉴스를 보니 FACEOBOOK의 창립자인 저거버거 부부가 2,500만 달라를 코로나바이러스 퇴치연구 기금으로 기증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그리고 어느 풋볼 팀(쎄인트)의 쿼터백은 500만 달라를 퇴치 기금으로 기증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그렇게 많은 성금을 낸 큰 손에 많은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미국에 힘이 되는 것은 이름 없이 수고하는 많은 분들이 있다는 것이다. 방송을 보니 어떤 나이가 많은 할머니는 부족한 마스크를 만들어서 기증하고 있음을 전했다. 구세군과 각 단체에서는 생필품들을 봉투에 담아서 분배하는 일을 자원 봉사자들이나 예비군들이 돕고 있다. 그<br />  <br />    뿐만이 아니다. 이런 비상사태 시에 도움이 필요한 가정들이 있게 마련이다. 내가 아는 목사님의 사모님은 초등학교 교사이시다. 목사님께 전화를 걸 일이 있어서 대화를 나눈 후에 사모님의 안부를 물으니, 학교에 출근하셨다는 것이다. 뉴욕 근교에서 사시니 마땅히 휴교를 하셨으리라 생각했는데, 출근 하셨다는 말에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래서 그 이유를 물으니, 학생들 가운데서 경찰이나 의료계통 종사자들의 경우에 부부가 다 일을 해야 하는 가정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전 9시부터 오후 1시 까지 그분들의 자녀들을 돌보는 일을 하신다는 것이다. 전교가 휴교를 하여도, 사회를 위하여 헌신하고 봉사해야만 하는 가정들을 돌보아 주고자 하는 획일적이지 않은 합리적 배려에 머리가 숙여진다.<br />  <br />    정부나 주 정부는 물론 카운티와 시에서도 계속해서 광고하고 홍보하는 것은, 사람 사이의 거리 두기와 손 자주 씻기 그리고 가능한 한 외출하지 않기 등이 계속 반복된다. 그러다 보니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오고 답답한 날들이 길어지게 마련이다. 사실 언제 이런 규제들이 해제 될지는 누구도 모른다. 최소한 각급 학교가 개교할 예정일이 5월 1일이라고 하더니, 개학 없이 여름 방학으로 들어간다고 한다. 그러니 이런 가깝한 상태가 계속되리라고 생각한다. TV 뉴스를 시청하다 보니, 이런 시기에 호황을 누리는 사업도 있다는 것이다. 다른 것이 아니라, 마리화나 가계가 성업 중이라는 것이다. 약 4년 전만하더라도<br /> 캘리포니아에서는 마약인 마리화나는 의약용 이외에는 재배와 판매가 금지 되었었다. 그런데 주민 투표에 의하여 리크레이션 마리화나라는 미명하에 버젓이 판매하게 되었다. 이번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로 인하여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들의 구매로 인하여, 맛을 본 사람들이 상습적으로 피우는 사람들이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해본다. 당부를 하기도 했다.<br />  <br />    정부로서는 딱한 형편에 놓인 국민들의 위하여 미국에서 세금을 내는 성인 가운데 80% 정도에게 1인당 1,200불의 지원금을, 어린이들에게는 한 명당 500 불을 지원하는 2조 억 달라를 넘는 예산을 상하 양원 양당 일치로 가결하였다. 이런 일련의 조치들이 근본적으로 문제를<br /> 해결 할 수는 없어도, 이런 어마어마한 일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하나 된 힘이 참으로 대단한 것이다.<br />  <br />  이상에 열거한 사항들은 40여년 이민 생활에서 내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일들이다.<br />  <br />  <br />                                                                                                                                                                        (2020. 03.29)